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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본문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애니메이션이야기

마당을 나온 암탉

바람분교장 2013. 1. 22. 07:03

      

  •  마당을 나온 암탉
  •  감독 : 오성윤

  •  제작 : 명필름          오돌또기

  •  제작년도 : 2011


     

Written by 한승태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50여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넘어 200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200만이 넘는 관객들은 이 작품의 어떤 호소력에 공감을 하였을까? 우선 이 작품은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장편 동화가 원작으로 오랫동안 서점가에서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얻어왔다. 그렇다고 모든 스테디셀러 원작이 영화흥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글로 쓰여진 원작들은 독자들 각자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되기 때문에 그것을 영상화했을 때, 각자의 상상력에 미치지 못했을 경우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원작이 뛰어나 많이 읽힌 경우라면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이 성공하였다는 것은 원작의 힘도 있었겠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매력도 충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최근 3D 애니메이션과 더불어 입체영화의 틈바구니에서 2D 애니메이션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매력이 제작기법에 기인했다기보다는 스토리 자체의 매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이미 알려진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작에서 잘 살려야 할 것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서사를 추가해야 할 것들이 필요하지만, 이는 원작의 감동을 한층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대개 성공한 원작이라면 관객들은 각자의 감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작에서 너무 벗어나는 경우 이질감으로 실망을 느끼게 된다. 관객들은 원작에서 느낀 감동의 실체를 영상을 통해 한 번 더 학인하고 싶어한다. 이때 원작의 내용, 글로 쓰인 내용을 그대로 영상화할 경우 대부분 관객들은 실망을 하게 되는데 이는 원작의 행간에 숨은 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의 내용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원작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황선미의 원작을 먼저 살펴보자.

    ‘잎싹’은 양계장의 좁은 닭장에 갇혀 매일 알 낳는 일만 하는 암탉이다. 항상 닭장을 탈출하여 마당에 나가는 꿈만 꾸던 '잎싹'은 어느 날 껍데기도 여물지 못한 알을 낳고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알을 낳지 못해 ‘폐계’ 판정을 받고 버려진다. 버려진 구덩이에서 족제비의 먹이가 될 뻔한 '잎싹'은 청둥오리 ‘나그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 나그네와 함께 농가의 마당으로 입성한다. '잎싹'에게 마당은 꿈에 그리던 곳이다. 양계장에 갇혀 지낼 때, 마당의 삶을 동경해 왔기 때문이다. 마당에는 여러 마리의 집오리와 한 쪽 날개를 다쳐 날 수 없는 청둥오리 ‘나그네’, 늙은 개, 수탉, 그와 짝을 이루는 암탉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청둥오리 ‘나그네’를 제외하고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서 쫓겨난 어느 날 '잎싹'은 찔레 덤불 속에서 알 하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알처럼 정성스레 품게 된다. 그 알은 나중에 알게 되지만 나그네와 짝짓기를 하고 족제비에게 물려간 뽀얀 암컷 오리가 낳은 알이었다. 나그네는 먹이를 물어다주고 족제비의 공격으로부터 '잎싹'과 알을 보호한다.

    달이 완전히 기운 날 밤,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킨다. 청둥오리는 족제비에게 희생되고 '잎싹'은 알에서 부화한 예쁜 ‘아기’를 보게 된다. '잎싹'은 ‘아기’를 족제비로부터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 다시 마당으로 가지만 닭들은 오리알을 부화시켜 자기 새끼처럼 데리고 다니는 '잎싹'을 수치스럽다고 거부한다. 이와 달리 집오리들은 ‘아기’가 같은 족속이라고 마당과 헛간에서 살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견이 엇갈리고 헛간이 소란스러워 나온 농장주인은 '잎싹'과 아기오리를 욕심내어 가두려하자 '잎싹'은 아기오리를 데리고 다시 마당을 나온다.

마당에서 나온 암탉에게 들판과 저수지는 규칙과 규율이 사라진 열린 공간이지만 약육강식으로 위험 가득한 세상이다. 특히 끊임없이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족제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아기오리가 자라기에는 좋은 공간이어서 잘 자라 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하지만 아기오리 ‘초록머리’는 점점 성장할수록 엄마 ‘잎싹’과 자신이 다른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늦가을이 되자 철새인 청둥오리 떼가 저수지로 몰려오면서 '잎싹'은 ‘초록머리’와 이별하게 되고 ‘초록머리’는 자신의 족속인 청둥오리의 무리와 함께 떠나가고 홀로 남은 ‘잎싹’은 족제비의 어린 새끼들을 위해 자진해서 족제비의 먹이가 된다. 이렇게 동화에서는 홀로서기를 하는 ‘잎싹’이 주인공이다.

   

 

    그럼 이제부터 원작 동화와 차이를 보이는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살펴보자.

    영화는 양계장에서 사료를 먹으며 알 낳기에 힘쓰는 닭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여기 단 한 마리의 닭, 자신의 알을 빼앗기고 알조차 부화시키지 못하는 닭, 심지어는 단식하며 알 낳기를 거부하는 '잎싹'은 마당을 내다보며 마당에서 삶을 꿈꾸다 자신의 계획을 친구인 참새 ‘짹’에게 들려준다. 이때까지 '잎싹'의 꿈은 마당에 나가는 것이었다. 영화 속의 '잎싹'은 스스로 단식하여 죽음을 가장하는 등 강한 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양계장을 벗어나는 매우 능동적인 캐릭터라는 것이 원작과 조금의 차이를 보인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능동적이지 않더라도 어떤 힘이나 상황에 처하여 능동적으로 변하여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주관객인 아이들은 능동적인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잘하기 때문이다.

 

 

    '잎싹'을 죽은 것으로 판단한 주인은 죽은 닭들을 갖다 묻는 뒷산 구덩이에 버린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경고에 정신을 차린 '잎싹'은 족제비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 밖의 위험에 대해 처음 알게 되고, 원작과 달리 이미 마당을 나와 살고 있는 ‘나그네’ 청둥오리 덕분에 목숨을 구한 '잎싹'은 꿈에 그리던 마당으로 가게 된다. 원작에서는 ‘나그네’가 ‘잎싹’을 데리고 마당으로 가지만 영화에서는 ‘잎싹’이 나그네에게 마당에 같이 가자고 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잎싹'이 꿈에 그리던 마당은 수평적 노동계급에서 기계처럼 일만하며 수탈당하던 양계장과 달리 수직적 위계질서와 규칙이 분명한 곳으로, '잎싹'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이렇게 쫓겨난 '잎싹'은 하는 수 없이 그토록 원하던 마당에서 나와 들판의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이 작품은 위계질서와 직분에 따른 삶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스토리 세계를 설정한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양계장의 모습은 공장처럼 기계화된 닭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생명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먹이 주는 기계에 따라 움직이고 알을 낳는 기계로 변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잎싹’이 처한 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누구라도 그런 환경의 삶이라면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에 익숙해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당의 식구들은 '잎싹'을 원래 있던 양계장으로 되돌아가 직분에 충실하라고 충고한다.

그럼에도 ‘잎싹’은 돌아가는 것보다 스스로 마당에서 나와 더 넓은 들판으로 가게 된다. 양계장의 좁은 닭장에서 동경하던 마당에 나온 암탉이 마당에서 그 마당을 뒤로하고 마당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마당에’ 나온 암탉과 ‘마당에서’ 나온 암탉이 그것이다.

 

 

    들판에 나온 '잎싹'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수달을 만나게 되고 작명이 특기인 '잎싹'은 수달에게 ‘달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저수지의 공인중계사인 ‘달수’는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부탁으로 '잎싹'에게 찔레덤불을 숙소로 정해준다. ‘달수’는 들판과 저수지에 없어서는 안 될, 모든 일에 참견하는, 그렇지만 마음 따뜻하고 정 많은 캐릭터로 ‘잎싹’과 ‘초록이’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래서 원작과 달리 재미를 부여하는 수달 ‘달수’는 '초록이'의 정체성과 '잎싹'의 모성애를 보여주는 극의 주요 전개에 깊이 관여한다. 따라서 ‘달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중 능력 있는 보조자에 해당한다.

    이런 친절한 ‘달수’와 나그네가 살고 있는 곳은 스스로 모든 삶은 해쳐나가야 하는 곳이며 누구나 차별 없이(나중에 마당에서 쫓겨난(?), 아니 그보다는 초록이의 나는 모습에 각성하여 마당을 떠나온 수탉마저도 받아준다) 받아들이는 열린 공간이지만 위험이 늘 도사고 있는 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에 반해 마당은 질서와 규칙을 중시하는 닫힌사회로 농장주인의 사육 조건에 맞추어진 폐쇄공간이고 수탉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권위 사회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꿈을 잃고 수탉에게 무시당하면 살아가는 집오리가 있고, 수탉의 명령과 권위를 지키는 문지기 개가 사육되며 살아간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은 마당 안과 마당 밖의 삶의 법칙을 확연하게 구분하여 공간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러면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잎싹'이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잎싹'은 처음 마당으로 나가기까지는 마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살며, 자신만의 알을 낳아 부화시키고 싶어 한다. 자신의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 고민한 결과이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잎싹'은 양계용으로 무정난을 낳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되는 닭이지만, 보통의 암탉처럼 자신의 알을 낳아 부화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소박한 바람은 간신히 마당으로 나온 첫날 여지없이 깨어진다. 마당의 규칙에 의하면 그녀는 양계장에서 알이나 낳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잎싹'은 처음으로 스스로 들판에 나서며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알은 아니지만 나그네와 뽀얀오리의 알을 품어 부화시켜 스스로 엄마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며 태어난 보람을 느낀다. '잎싹'은 스스로의 꿈은 아니었지만 넓은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소망과 생의 보람을 개척하는 캐릭터이다. '잎싹'이 하고자 하는 일은 자신의 아이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잎싹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그녀가 남몰래 좋아하던 나그네 청둥오리와 ‘초록’이를 낳은 뽀얀오리가 희생되고서야 '잎싹'은 엄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도 마지막에는 족제비의 새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놓은 희생자가 '잎싹'이로 세상의 어머니들을 대변한다.

    또한 농장에서의 재탈출과정을 살펴보면 '잎싹'의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원작에서는 '잎싹'이 ‘초록머리’를 데리고 안전을 위해 마당으로 돌아가고, 집오리들은 같은 종족이라고 ‘초록머리’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와 달리 집오리들이 밭에서 만난 ‘초록이’를 농장의 마당으로 끌어들여 위험에 빠뜨리며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짓만 한다. 결국 농장 주인에게 잡힌 '초록이'이의 소식을 들은 '잎싹'은 '초록이'를 구하기 위해 농장을 다시 찾고 달수와 참새 ‘짹’의 도움으로 닭장에서 뛰쳐나온 닭들로 혼란을 만들어 묶여있던 '초록'을 어렵게 구해낸다. 이를 통해 '잎싹'의 모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닭장 문이 열렸어도 움직이지 않는 닭들과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잎싹'을 대비하여 성격을 더욱 부각시킨다.

 

     원작이 '잎싹'의 삶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원작과 조금은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전반부의 주인공은 ‘잎싹’이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미미했던 존재인 ‘초록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마치 영화 <대부>에서 전반부의 주인공이 아버지였다가 후반부에는 아들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결국에는 새로운 대부로 성장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록이'는 왜 자신은 엄마인 '잎싹'과 다르고, 자신은 누구인가를 알고자 한다. 엄마는 물에만 젖으면 병이 나는데, 자신은 물속에서 노는 것이 더 좋고, 엄마는 날지 못하지만 자신은 왜, 날고 싶어 하고 결국 날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청둥오리들의 방문으로 자신이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자식이고 닭이 아닌 청둥오리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파수꾼을 뽑는 시합에서 당당히 우승하여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엄마와 헤어져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청둥오리들과 길을 나선다. 파수꾼 시합이 원작에서는 간단한 이야기지만 영화에서는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스펙터클한 비행시합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어린 '초록이'는 영화 중반부터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볼거리와 긴장감을 제공하며 당당한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영화는 모성애에 눈떠가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는 '잎싹'의 이야기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더 넓은 세상을 찾아가는 '초록이'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어느 주인공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보아도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원작과 다른 점일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초록이'의 날개와 비행은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잎싹'으로서는 꿈조차 꿔보지 않은 거대한 이상이었고, 더 큰 세상을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초록'에게는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일이며 세상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주요한 소재이다. 날개 한쪽을 잃은 아버지의 희생과 '잎싹'의 희생이 날개와 비행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럼 '잎싹'과 ‘초록이’의 맞은편에서 이들이 움직이게 하는 안타고니스트라고 한다면, 가부장적 질서로 대변되는 수탉, 획일화된 직분을 강요하는 사회, 이종 간의 사랑을 백안시하는 사회 분위기, 양계장에서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을 따라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가한 족제비일까?

    이 영화가 우리나라의 다른 애니메이션과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안타고니스트인 족제비에게 막연히 나쁜 놈이 아닌 나름의 보편타당한 안타고니스트라는 것이다. 족제비는 '잎싹'에게는 가혹할지 모르지만 스스로의 생을 열심히 살려는 자에 불과하다. 그는 약육강식의 자연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는 맨 마지막 장면(개인적으로는 좀 불만이지만)에서 '잎싹'이 ‘초록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보낼 때, 족제비는 자신의 배고픈 자식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잎싹'을 물어뜯는 것으로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어머니의 희생으로 자식은 새로운 세상, 꿈꾸던 세상을 찾아가는 것이다. <끝>

 

 

오성윤 감독이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보자

 

    생각할 거리

    1) 이종 간에도 모성은 존재하는가?

애완견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보편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다.

 

 

    2) 서사적 상상력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서사적 상상력은 특수한 사건들을 다양한 플롯들로 보편화시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형태들을 인간 삶의 기쁨과 고통에 연관시킬 수 있다. 이는 서사적 상상력이 곧 윤리적 능력임을 의미한다. 윤리적 능력은 우리와 타자들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 삶의 행복 또는 불행 및 고통의 원인 파악, 그리고 평화적 공존에 관한 것이다.

 

3) ‘잎싹’의 희생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작명가,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공, 이름은 존재를 만드는 집이다. ‘잎싹’이라는 이름은 아카시아 나무의 잎사귀를 보고 암탉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잎사귀가 꽃을 피우고 햇볕과 바람, 비를 맞아가면서 푸르게 자라다가 가을에 노랗게 변해서 지고는 나무의 거름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잎사귀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 암탉이 자기도 잎사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서 이름을 ‘잎싹’이라 지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날 무렵 ‘초록’이 동료들과 함께 ‘잎싹’을 떠나게 된다. ‘초록’이를 잘 키운 잎싹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그 죽음은 바로 어미가 된 족제비를 위해 암탉 ‘잎싹’은 또 다른 생명을 키우는 잎사귀로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내리는 눈을 아카시아 꽃잎이 내리는 거라 여기며 행복한 죽음을 맞는다. 이런 결말은 개인적으로 끔찍하다. 왜 이 사회는 희생을 요구하는가? 왜 그것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여기는가? 나로서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가 싫다. 자 이제 여러분이 답을 해라, 왜 희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