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면에서 <돼지의 왕>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닮았고, 약자의 패자부활전을 도모하는 학원 폭력물이라는 점에서는 <말죽거리 잔혹사>를 연상케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보다 울림이 크고,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재미있다.
<돼지의 왕>에는 그 어떤 전작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우리 사회에 대한 거대한 은유와 함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괴롭히는 동급생·상급생을 개로, 괴롭힘당하는 왕따 학생들을 돼지로 비유하며 피지배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돼지의 왕’에 대해 이야기한다.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는데 그렇게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이 그보다 더 잔혹하기에. 장편 데뷔작으로 작가주의 감독 반열에 올라선 연상호 감독을 영화 개봉 전날인 11월2일 만났다.
ⓒ시사IN 조우혜 |
<돼지의 왕>은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 같다.
힘없는 사람이 살기에 얼마나 복잡한 세상인지 얘기하고 싶었다. 영화 속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싸움도 잘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어서 이상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중학생 싸움은 근육 싸움이나 기술 싸움이 아니라 자신감 싸움이다.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 부모가 뒷감당을 다 해주는 아이들은 자신감이 있다. 반면 가난한 아이들은 뒷감당이 안 되어 주눅 들게 되어 있다. 실제로 서울 압구정동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돈 많은 집 아이가 공부 잘하고 힘도 셌다. 집이 부자면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감 덕분에 싸움도 잘했다.
가난 혹은 약자에 대한 묘사가 섬세한데.
가난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중학교 때 돈가스를 처음 먹었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포크·나이프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런 게 지금도 있는 것 같다. ‘먹물’들이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주눅 드는 내 모습을 보며 그것이 나에게 또 다른 포크·나이프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영화에 주인공 종석의 누나가 워크맨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걸 훔쳐서라도 써봐야 자연스럽게 세상에 녹아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써보지 않고 해보지 않고 먹어보지 않으면 위축된다.
<돼지의 왕>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싸움도 잘한다. 연상호 감독은 “사실이 그렇다”라고 말한다. |
기득권의 비리 구조가 아니라 그 아래서 신음하는 피지배 계층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리고 싶었다. 기득권은 연대하기 쉽다. 이해관계만 맞아도 쉽게 연대한다. 오직 이익인가 아닌가만 판단하면 된다. 그러나 피지배 계층은 다르다. 붙어도 이익이 안 되고 붙지 않아도 이익이 안 되는 딜레마에 자주 놓인다. 이해관계가 복잡해서 연대하기도 쉽지 않다.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한다. 영화에서 경민과 종석은 같은 ‘왕따’ 신세지만 한쪽은 부자 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가난뱅이 아들이라 태도가 갈린다.
다 같이 당하는 처지이지만 경민과 종석, 찬영과 철이는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아빠가 부자인 경민이 먼저 배신한다.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다. 종석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설정인데, 희망이 잘못될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그렸다. 찬영은 기득권에 편입되는 피지배 계층의 모습이다. 기득권의 입장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기회주의자인데, 한나라당에 입당한 운동권 출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돼지의 왕’인 철이는 우상적 존재인데, 그의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가해 학생들은 약자를 괴롭힐 때 꼭 명분을 내세운다. 무슨 의미인가?
이들은 ‘네가 약하니까 괴롭힌다’가 아니라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네가 분위기를 흐리니까 손봐준다’라는 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촛불집회 때도 그렇지 않았나. 경찰이 태연히 “여러분은 불법 집회를 하고 있어서…”라고 시민을 불법자로 몰며 정의의 물대포를 쏜다. 그런 우리 사회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속에서 피해자는 괴로워 죽을 것 같은데 가해자는 이를 놀이쯤으로 여긴다.
재벌 1세와 같은 예전 기득권층은 악독하고 악랄한 표가 났다. 힘들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 2세와 3세로 가면 귀하게 커서 예쁘고 착하게 생기고 말도 나긋나긋하게 한다. 상식을 가장한 그들은 우아하고, 상식을 지키는 우리는 쌍욕을 한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왜 저러지?”라면서 이상하게 생각한다.
영화 속 교사들도 가해 학생 편에 서 있다.
기득권은 단순히 폭력이나 권력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뒷받침으로 지탱된다. 가해 학생들이 필요한 순간에만 담임이나 학생부 교사들이 불려나온다. 법과 제도가 약자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 강자들이 쓰는 하나의 무기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현실을 담고 있지만 보기에 불편하다는 감상평도 많다.
제3자의 시선으로 관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당사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스토리를 풀고 갔다. 내부의 시선으로 만들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관객들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중학교 때는 학생들 간에 신체적 계급 차이가 선명하다. 아직 발육이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어른처럼 자라 있다. 그 차이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읽어낸다.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한 시나리오지만 이명박 정부 때는 꼭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보면서 더욱더 절망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분노’였다. 나만의 분노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가진 공통의 분노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이 분노를 드러내기를 겁낸다. 그래서 포장하고 감추고 엉뚱한 곳에 쏟아낸다. ‘영화를 만들 정도로 공통된 분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서 철이가 그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이때를 기억하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지 못하겠다. 지금 이때가 악몽이 되게 만들어주겠다”라고. 이런 분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외 반응도 좋다고 들었다.
해외 게스트들이 영화를 너무나 잘 이해했다. 한국의 특수 상황이라고 이해했는데, 전 세계의 상황이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뉴욕영화제 관계자는 “모든 것이 명확하다. 질문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고,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흥분하면서 “이 영화를 빨리 세계에 소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개봉관이 적은데 좀 많이 볼 수 있도록 확대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