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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話的 想像力과 애니메이션 본문
神話的 想像力과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의 <도깨비 공주> , 1997년 작, 150분, 일본
Written by 한승태
최근 이탈리아의 지진과 진행 중인 우리나라 경주의 지진, 또 몇 년 전 일본 후시마의 지진과 원전 사고는 인간의 문명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 대한 도전의 역사를 멈추지 않아왔다. 이제부터는 도전에 대한 응전, 즉 재앙의 역사가 시작될 모양이다. 이것도 순전히 인간의 착각일 수 있지만 말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자연의 재앙에 인간의 감정을 대입하여 하늘을 원망하지만 자연 혹은 신은 불인(不仁), 인간의 자애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물들이는 건 오로지 인간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지진 해일과 원전 폭발로 쑥대밭이 되었다. 원전이 있던 후쿠시마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허가 되었다. 적어도 후쿠시마는 앞으로 백년까지 사람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수도권까지도 방사능 오염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그 피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라고 사람들은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될 정도로 이웃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공포다.
후쿠시마의 앞바다는 원전에서 버린 오염수로 바다 생명들도 위험에 처해있다. 우리는 이번 일본의 사태를 보면서 새삼 원자력의 위력에 절박한 공포를 맛보았다. 누구보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잘 알았던 일본이었기에, 기술의 일본이라는 자부심으로 세계를 누비던 일본이었기에 그 같은 일이 일본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그 놀라움과 공포는 더더욱 컸다.
세계적으로 각 나라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원전설립 정책을 포기하는 나라들이 생기고 더 이상 원전이 값싼 에너지원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한번 가동된 원전은 그것을 정지하는데 더 큰 비용이 든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는 새로 알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어리석어서 원전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어느 나라 멍청한 권력자들도 있기는 하다.
우리는 불의 발견으로 문명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것을 도구로 하여 자연과 신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왔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을 약탈하여 일구어낸 성과라는 데는 일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약탈적 개발은 자연파괴와 그에 따른 환경 문제를 끊임없이 불러왔다. 이러한 약탈의 결과로 벌어지는 사고와 재앙에 대해 인간은 무시하거나 과도한 공포로 대응하여 왔다.
새삼스럽지만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원자력의 위험은 지속적으로 상존해왔다. 체르노빌의 사고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원자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통제의 수준을 기술의 척도로 삼아 자랑하여 왔다. 그래서 원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심(원자력 마피아)을 버리지 않은 것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진단도 있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일부이며 몸통인 삶의 기반을 망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재앙 앞에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는 애니메이션이 한 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도깨비 공주(모노노케 히메)>가 그것이다. 개봉 당시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단순하게 자연을 보호하자, 사랑하자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을 선악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일본에 자생하는 신들을 내세우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재앙신이 된 거대한 멧돼지가 주인공 ‘아시타카’의 마을을 덮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멧돼지는 처음부터 재앙신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름난 산의 신이었던 멧돼지는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재앙신(타타리가미)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주인공 ‘아시타카’의 희생으로 마을을 재앙신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지만, 장차 부족을 이끌 젊은 인재가 재앙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런 아시타카가 재앙의 원인을 찾아 길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의 일족은 전란을 피해 산속에 숨어사는 동방의 에미시 부족으로 그려지는데, ‘히이사마’로 대표되는 무당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원시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주인공 아시타카는 사슴을 타는 자이며, 스스로 저주 받은 운명을 받아들인 자이며, 재앙의 저주를 풀려는 자로 직관과 영감을 가진 견자 혹은 무당으로 그려진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는 스스로 재앙신의 무자비한 힘을 드러내기도 하나 자연으로 상징되는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려는 무당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한 자이다.
영화의 제목이자 여주인공의 이름인 도깨비공주인 ‘산’은 인간에게 버림받고 들개에게 키워져 시시가미(사슴神)를 지키는 신들의 전사이다. 이 영화의 갈등관계를 살펴보면 안타고니스트(반동인물)는 인간 문명의 신봉자인 여장부 ‘에보시 고젠’과 조정의 하수인 ‘지코’로 여겨진다. 즉, 자연에 대한 개발의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문명을 상징하는 ‘에보시’가 한축이라면 그런 개발에 대항하는 자연 혹은 신의 상징인 모로 일족과 인간에게 버림받은 소녀 ‘산’이 프로타고니스트(주동인물)의 역할을 한다. 여기에 아시타카는 이 두 힘의 중재자이며 화해를 시도하는 자의 역할로 그려진다.
‘에보시’는 자연을 개발하여 문명을 일구고자 하는 근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주류 권력으로부터 소외받은 자들, 즉 시장에 팔려나온 여자와 문둥병에 걸린 병자 등, 사회에서 핍박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모아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며 나름의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과의 공동체를 일구고자 도깨비들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철광석을 채굴하여 제철장에서 쇠를 녹여 삶을 꾸려간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야마토 조정의 하수인 ‘지코’의 계략을 알면서도 그에게 화승총과 화약을 받아 세력을 넓혀가고자 한다.
여기의 신들은 위계질서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전형적인 무속신들(샤머니즘계의 신)이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많이 등장하는 대지모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시가미(낮신)가 다다라봇치(밤신)로 길게 변하는 순간을 보면 사슴신이지만 용, 혹은 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농경민족의 大地母 신의 모습이다. 뱀은 순환하는 자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생명을 낳고 돌보는 자비로운 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잡아먹는 신이다. 식물의 죽음과 재생,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표상한다. 대자연의 신을 대리하는 도깨비 공주인 ‘산’에게서 무자비한 칼리 여신이 느낌이 나는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
스토리의 세계를 보면,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며 더 가지려하는 이 세상 그대로가 재앙인 시대이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던 시절이 지나고 인간의 욕심에 신들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신들의 권위가 도전받지만 아직까지는 신들이 살아 있던 때로 삶과 죽음이 순환되는 원리가 인간의 욕심에 의해 틀어지려는 때(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로 근대의 총포가 들어오고, 개간을 통해 인간의 영토를 넓히려는 집단과 기존 숲을 지키려는 자가 충돌하던 때)가 배경이다.
아시타카가 재앙의 원인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여행을 시작하며 만나게 되는 세상은 여러 갈등의 원인을 보여준다. 아시타카의 여정 중에 시장에서 현물거래가 아닌 화폐가 유통되는 사회를 보여준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화폐경제는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가 1:1로 이루어지는 물물교환 사회가 아닌 대량생산을 통한 잉여의 생산물이 생겨 자본의 축적이 가능한 사회가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축적된 세상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재앙의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의 현재성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신화를 다루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토리의 세계가 이야기의 갈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아시타카는 자신이 받은 재앙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어느 편에 서지 않고 공평무사하고 매사 흐림 없는 눈으로 살피고자 재앙신이 태어난 시시가미의 숲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주인공은 미션을 부여 받고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는 여타의 영웅들과 같은 행로를 따라간다.
아시타카는 여행에서 정체모를 ‘지코’를 만나 ‘타타라(제철장) 마을’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찾던 중 모로 일족과 도깨비 공주인 ‘산’에게 습격당해 죽어가던 타타라마을의 소몰이꾼 ‘코로크(짐꾼)’ 일행을 구해주게 된다. 더불어 숲을 통과하면서 숲의 정령인 코다마와 숲의 주인인 시시가미를 보게 된다. 또한 타타라 마을에서는 ‘코로크’를 구한 덕분에 환영을 받지만 타타라마을의 여장부 에보시가 타타리가미의 원흉인 것을 알게 된다.
시시가미의 숲은 샤먼들이 신성시하는 치유의 숲과 같다, 이러한 설정은 샤먼들이 존재하는 사회 여러 곳에 등장한다.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세계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라셀 카르티에의 글 <인디언과 함께 걷기>에는 사냥군의 화살에 맞은 곰이 숲속의 호수를 찾아 상처를 치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디언들은 이 호수를 '아타가히'라고 한다. 이 신비의 호수에 들어간 모든 존재들은 새롭게 태어난다. 따라서 호수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성역으로 그려진다.
이렇게 영화는 스토리의 세계와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갈등을 소개한다. 주인공 아시타카는 자신의 위크포인트인 저주의 재앙을 풀어야하는 운명과 에보시의 욕망과 재앙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자 지코,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항하는 모로 일족의 ‘산’과의 관계에서 외적 갈등이 설정된다.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도깨비 공주 '산'은 '에보시'의 목을 노린다. 오히려 총포로 무장한 에보시의 함정에 빠진 도깨비 공주 ‘산’,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으르렁거리며 사람들을 공격하던 '도깨비공주'를 아시타카는 몸을 상하면서까지 구하여 숲으로 들어간다. 이후 산의 도움으로 시시가미의 숲에서 치유가 된 아시타카는 인간과 신들의 싸움을 만류한다. 하지만 이미 숲과 산을 짓밟아 터전을 넓히려는 인간들과 그들의 야욕에 분노의 재앙신으로 변한 멧돼지를 비롯한 산신들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전쟁의 중심에서 자연의 편에 선 '도깨비공주'와 최강의 군대를 동원하여 터전을 넓히려는 ‘에보시’를 비롯한 인간들, 이 둘의 사이에 선 '아시타카'. 인간들은 이미 생명의 원천인 시시가미의 목을 획득하려는 음모와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에 인간들끼리도 암투를 벌인다.
자연을 대변하는 산의 입장과 삶의 터전을 넓히려는 인간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인간은 삶을 위해 어디까지 자연을 개발해야 하는가? 자연을 개발하는 것은 죄악인가? 이 대목에서 왜 설악산 케이블카가 떠오르지? 하여튼 에보시의 입장에서 자연은 무엇인가? 산의 입장에서 인간은 욕심을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두 개의 갈등 사이에 선 아시타카의 역할은 무엇인가?
에보시는 도깨비들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철광석을 채굴하여 제철장의 쇠를 녹여 삶을 꾸려가지만 이러한 그녀의 삶은 인간 삶의 궤적이기에 우리는 에보시를 쉽게 미워할 수가 없다. 에보시는 나름대로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안타고니스트이지만 그녀의 삶은 정당성이 분명 있다.
숲과 산을 짓밟아 터전을 넓히려는 인간들과 그들의 야욕에 분노의 재앙신으로 변한 멧돼지를 비롯한 대자연, 그 전쟁의 중심에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삶은 정당한가? 이와 같은 파괴의 방법으로 인간을 몰아내려는 자연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것을 자연의 응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애니메이션이 묻는다.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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