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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칸트의 동물원

바람분교장 2008. 8. 10. 12:35
 

칸트의 동물원

           이근화
 

 

1
꼬리를 밟지 않기에는
꼬리는 너무 길고 가늘고 아름답다


2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면
그건 자세가 아니라 행위지
초록 스타킹은 탄력을 잃고
곧 허물어진다
두 다리는 반복적이지만
길은 곧 사라지지
서툰 것들은 피를 흘리고
내내 피를 흘리지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골목에서
따로 헤매고
밤낮 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여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 밤의 전화벨 소리
 

5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다면
그건 사라지는 놀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중간부터
시작된다
 

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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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혈 청년시절 후배 시인한테, 그것도 여자 후배한테 500cc맥주잔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섬�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별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또 얼마나 씩씩댔을 것이며, 그 후배는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얼마나 드러워했을 것이며, 아니꼬왔을까. 세월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서러워진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세월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반복된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걸 아는대도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반복되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놀이를 해야한다. 모든 심각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주사위를 던질 줄 아는 것, 그게 필요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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