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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아가씨야 걸어 본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감독 : 유아사 마사아키
원작 : 모리미 토미히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제작사 : 사이언스 사루 외
배급 : 토호 / 미디어캐슬
인생에서 경구만큼 쓸데없는 건 없다. 그건 노인들이 젊어서 경험을 과장하여 새로운 젊은이의 무모한 모험을 막고 노인들의 통제 아래서 성공을 가르치기 위한 처세술일 뿐이다. 그건 노인의 인생이고 남의 인생이다. 젊은이의 인생이 아니다. 각자의 젊음에게는 각자의 인생이 있을 뿐이다. 설령 그것이 무모하여 인생을 망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 가르치는 인생이 아닌 직접 자신의 모험으로 인생을 알아야 한다는 애니메이션 한 편이 있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이며 인생이 덧없다는 이백이라는 노인은 검은 머리 아가씨와 벌이는 가짜 덴키브란이란 술 시합에서 말한다. 살만큼 산 노인네 이백에게 술은 허무한 인생의 맛이라고 그건 이백의 인생이고 술맛일 뿐이다. 이제 갓 어른이 된 아가씨에게 술은 밑바닥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맛이어서 인생을 막 꽃피게 한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고, 공허하고 고독하며 순식간이고,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는 노인네와 인생은 아름답다고, 주고받는 것이며 즐거운 것이고 인연의 끈이 이끌어준다는 아가씨와의 대결은 당연히 젊음의 끝나버린다. 젊음의 호기심을 지나왔던 노인이라도 또 새로운 젊음의 호기심 앞에는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뻔할 거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재미없을 거 같아도 애니메이션은 정말 재미있다. 유쾌하고 발랄하며 재치가 넘친다. 여기에 타이포그래픽은 물론 만화적 재미와 칼라의 조화는 이야기의 발랄함에 힘을 보탠다.
검은머리 아가씨의 인연은 클럽 선배의 결혼식에서 시작한다. 무작정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던 그녀는 처음 혼자 들어간 칵테일 바에서 비단잉어장을 하다 망하고 춘화를 수집하는 도도 씨와 만난다. 이어서 치과 위생사이며 밤의 여행자인 하누키 씨와 요괴 텐구라고 하는 히구치 씨를 만나 밤 여행을 계속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4개의 에피소드가 하나로 얽혀 있다보니 소설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만화식으로 요약하여 인물을 소개한다. 흥미진진하게 벌어질 4개의 에피소드를 하루 밤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끌어가기 위한 연출의도로 보인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은 새내기 대학생으로 어른들의 밤 문화를 즐겨보고 싶은 것이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선배는 검은 단발머리 새내기 후배와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연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소망은 매번 사건으로 연결되지만 그녀가 너무 순진하여 알아채지 못한다.
애니메이션은 검은 단발머리 새내기 여대생이 처음으로 매혹적인 어른의 세계를 홀로 경험하고 싶어 대학 클럽의 선배 결혼식에 들렀다가 쿄토의 기야마치에서 본토초 일대의 밤길을 순례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와 그녀를 짝사랑하여 몰래 따라가는 동아리의 선배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배치되어 있다.
단달머리 아가씨는 대학 클럽의 선배 결혼식에 나온 음식, 큰 접시에 나온 달팽이요리가 기차의 바퀴모양으로 바뀌면서 모험은 시작된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그녀의 기차바퀴는 새로운 모혐을 시작한다. 기차의 저돌적인 성격의 검은 머리 아가씨의 성격은 물론 여행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 되돌릴 수 없는 모험인 셈이다. 그녀는 모험에서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에 관객들의 관심은 집중된다. 반면 남자 주인공인 검은 머리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선배는 그녀와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자 하지만, 그녀와 연결된 인연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그녀와의 만남이 지연된다. 그러니 자연 그녀와 잘 되고자 하는 선배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에서는 이들이 주인공인 4편의 에피소드가 여러 날에 거쳐 진행되지만 유아사 마사아키의 애니메이션은 첫 번째 이야기에 나머지 작품을 합하여 하루 밤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소 산만한 것도 있지만 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잡아주며 통일성 있게 진행된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심리묘사와 분위기를 만드는 배경의 묘사는 아주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작품에서 벌어지는 캐릭터들의 활약과 사건들은 현실감을 벗어나 판타지를 제공함으로써 진부한 주제를 새롭게 선보였다. 애니메이션은 이를 위해 선을 단순화하고 칼라풀한 디자인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기술로 제작되어 한 장면의 스틸 컷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상영 중에는 누구도 플래시라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상은 훌륭하다. 캐나다 오타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장편 부분 대상을 비롯하여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원작 소설도 재미있다. 그녀는 2003년 <태양의 탑.으로 제 15회 일본 판타지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여 2006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제 20회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하고 130만부가 팔려 서점 판매대상 2위를 비롯하여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펭귄 하이웨이>로 31회 일본 SF대상을 수상, 서점 판매 대상 3위에 올랐을 정도로 인기 작가이다.
작품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학창시절의 일탈과 로맨스다.
교토 대학과 그 주변을 모티브로 무대를 삼아, 어딘가 모자란 남학생과 순진한 여자 후배의 사랑 이야기를 두 가지 시각으로 교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해학이 넘치는 작품이며, 가끔씩 초현실적인 알 수 없는 에피소드도 섞여 있다. 또 옛 문장을 자주 인용한 것도 특징이다. 소설 제목은 요시이 이사무가 작사한 <곤돌라의 노래> (ゴンドラの唄)의 가사 중 첫구절에 해당되는 "인생은 짧아 연애하라 아가씨야" (いのち短し 恋せよ乙女)란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2008년 12월에는 가도카와 문고에서 문고판이 나왔으며, 애니메이션 개봉에 맞추어 2017년 4월 가도카와 츠바사 문고에서 아이들을 위한 후리가나와 삽화 등을 추가한 특별판이 나왔다. 특별판은 대한민국에서도 애니메이션 개봉시기와 맞추어 2018년 3월에 작가정신에서 출판되었다.
2017년 4월 7일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에 의해 애니메이션 극장판으로 일본에서 개봉하였다.[3] 제41회 오타와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부문 그랑프리, 제41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였다.[4] 극장판은 미디어캐슬의 수입으로 2018년 3월 29일 대한민국에서도 개봉하였다.[5]
변화무쌍하여 5분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를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기호와 상징, 대사 하나하나에 꼼꼼히 주석을 달아가는, 그래서 본문 텍스트보다 주해의 텍스트가 훨씬 두꺼워지는 독해법이 그 하나. 미리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보고,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다섯권의 만화까지 보면서 철저히 대비하는 전투태세 모드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 그러기엔 우리의 밤은 짧다(만화책은 절판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기호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각 파편들의 장면과 사건, 진행 속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 그러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관객이라면 둘 중 하나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후자를 추천한다. 어쨌든 우리의 밤은 짧으니까).
앨리스를 위한 장진 주사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를 이상한 나라에 빨려들어간 앨리스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 앞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인물들은 뜬금없다. 각자가 지닌 사연을 들어본다 한들 그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이 벌이는 상황 전체를 더 잘 파악할 수도 없다. 그저 앨리스를 따라가면서 그녀에게 닥치는 사건들과 그다음 사건으로의 전개를 바라보는 수밖에. 마찬가지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인물들도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넘쳐나지만, 우리의 머리와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그저 사연을 뱉어내는 비트에 맞춰 우리 몸을 흔드는 게 낫다.
다행히 마지막 5분을 남겨두고 이제껏 휘몰아쳤던 사건들을 큰 덩어리로 분류해준다. 술내음 물씬한 폰토초(교토의 대표적인 밤문화 거리)의 봄, 매운맛과 함께하는 여름날의 헌책시장, 게릴라 무대로 야단법석인 대학 축제의 가을, 그리고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는 겨울. 정신없이 휩쓸려 떠내려온 관객일지라도 그제야 어느 정도 이야기의 얼개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을 벗어난 밝은 시간대로 마무리짓는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차분하고, 왠지 설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침없이 내달린 롤러코스터가 정차할 즈음의 평온함 혹은 토끼굴에서 벗어나 잠에서 깨어난 앨리스가 맛보았을 고요함이 이러하리라.
화는 대립과 어긋남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인다. 남과 여는 어긋나고, 향수에 젖은 기성세대와 무기력한 젊은 세대는 대립한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밤마실을 떠나는 주인공은 대책 없이 순수해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온전해 보인다. 길 잃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마침내 자신의 길을 잃지 않은 비결이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파티와 축제는 여러모로 ‘반문화’의 성향을 띤다. 여기서 반문화는 치밀하게 기획한 전략이 아니라 난센스와 부조리에 가깝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반문화는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객기이거나 (지금의 젊은 세대 입장에서) 희망이 없기에 뱉어내는 탄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문화는 바짝 말라 시들어버린 청춘을 위한 마지막 심폐소생술이기도 하다.
떠들썩한 난장판마저 사라진다면 삶은 지독한 독감에 시달리다가 무너지고 말 테다. 그나마 술잔을 부딪치고, 연애를 응원하고, 헌책일지언정 그 가치를 아는 누군가에게 전하려들 때 어긋남과 대립은 (잠시) 해소된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신없는 거리에서도 그 무언가를 함께, 은연중에 원하고 있었다.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포스트 곤 사토시
예전 인터뷰에서 유아사 마사아키는 자신을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곤 사토시에 가깝다고 일컬었다(두살 차이가 난다). 곤 사토시가 오시이 마모루로부터 출발하여 자신만의 차별성을 만들어낸 것처럼, 곤 사토시로부터 유아사 마사야키는 또 다른 변별점을 찾아냈을까? 오시이 마모루, 곤 사토시, 유아사 마사아키를 하나의 공통군으로 묶는 것이 가능할까? 그들의 대척점에 미야자키 하야오를 세운다면 무엇인가 어렴풋한 경계선이 떠오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서는 쌍방간 대립을 극복하면서 (이전보다 나은) 하나의 균형적인 질서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강렬하다. 때로는 그 질서를 위해서 위계적 협동(그리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리고 테크놀로지는 가급적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반면 오시이 마모루, 곤 사토시,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들에서는, 대립을 극복하고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기획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결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공통적으로 이들에게는 체계/체제/세계의 완성보다는 네트워크의 작동이 훨씬 부각된다. 네트워크 회로 속에서 다양한 권력과 이해관계가 쉴새 없이 돌아간다. 현재라는 상황은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그 속에서 힘이 재편되는 잠정적인 상태이다. 테크놀로지는 네트워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망의 단면들을 중계하는 미디어로 쓰인다. 이러한 공통점 속에서 실제의 익숙한 공간(실명으로 등장하는 도시, 그리고 골목)은 어느 순간에 복잡한 미로가 되고, 사람들은 숨가쁘게 숨바꼭질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오시이 마모루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거의 허물어버리는 반면, 곤 사토시는 영화의 편집 문법을 더욱 정밀히 가공하되 애니메이션만의 표현 가능성과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에게는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가려는 기운이 강하다. 그래서 대놓고 두 가지 대비되는 스타일, 소위 ‘극화 스타일’과 ‘카툰-일러스트 스타일’로 작품을 만들어간다. 전자에는 인물들이 겪는 현재의 사건이, 후자에는 감정과 정서, 과거의 기억이 담긴다. 그런데 유아사 마사아키의 극화체는 사실적인 재현 대신, 그것을 한껏 과장시키고 비틀고 뒤튼다. 풍경은 광각의 왜곡상으로, 인물의 엉뚱한 몸짓은 늘어난 팔다리로 표현되며, 공간적 깊이감은 납작한 레이어들을 얹어놓는 식으로 대체된다. 어차피 사건들이란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주목할 것은 카툰-일러스트 스타일이다. 그 원류를 찾자면 1950~60년대의 모던 카툰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데즈카 오사무가 기다리고 있다. 당시 새로운 애니메이션 미학으로 떠오르던 모던 카툰 스타일로 자신만의 미적 실험을 하던 데즈카 오사무의 탐색은 아쉽게도 <철완 아톰>의 TV시리즈 작업 때문에 멈췄다. 유
아사 마사아키는 거기에 색감을 더욱 강렬히 끌어올려서 자기 작품의 한축으로 삼는다.
요컨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대립으로 가득하되 어느 하나의 배제나 극복이 아닌 공존을 추구한다. 스토리 면에서든, 스타일 면에서든 말이다. 불안정해 보일지언정 그게 삶이다. 인생이 하룻밤에 축약되어 있다면 낮은 무엇일까? 밤과 붙어 있는 낮도 인생이겠지. 그리고 현실논리가 지배하는 시간대가 낮이라면 밤은 그로부터 억눌려왔던 욕망이 작동하는 시간대일 테고. 혹여 누군가에게는 낮과 밤의 논리가 반대일 수도 있겠고,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이네. 안 그런가요, 검은 머리 아가씨? 글 나호원(애니메이션 연구가)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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