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버닝_이창동 본문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영화 이야기

버닝_이창동

바람분교장 2018. 6. 3. 11:35

무엇을 태울 것인가?

이창동의 (버닝>

 

한승태(시인/학예연구사)

 






정말 오랜 만에 극장에 가 영화를 보았다. 그것도 아내와 큰 딸을 대동하고 청불영화를 같이 보았다. 믿을 만한 지인의 소개였기에 큰 맘으로 갔던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페북에서 얘기하는 대로 영화는 잘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분명해 보였다.

 

우리 사회는 혹은 나는 언제부터 그렇게 분노에 노출되어 있는가? 지난 9년 여간 내게서 분노는 떠나가지 않았다. 그건 직장 내에서, 가정에서, 일부는 자신에게서 비롯되었고,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으로부터 피드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떄 루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갈수록 디자인 개념이 사회를 포장하고 있었다. 그런 사회에 살고 있고 살아왔다. 현재진행형이다. 사회 구성원의 2%가 국민 80%의 부를 독차지하고, 그 밑의 5%가 나머지 14%를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이 5%의 부를 나눠 갖는 기형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한번 정해진 신분은 고착되고 있다. 사회 내에 구조화가 가속되었다. 개개인의 삶에 내재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에 따른 반작용이 분노가 아니었을까?

 

영화 얘기하다 말고 뭔 분배의 얘기냐고, 내가 보기엔 이 영화는 그걸 얘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영화는 일정한 서사보다는 은유로 되어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곳곳에 들어난 은유들을 종합하면 그런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영화는 상징되는 인물과 그에 따른 은유가 중요하다.

 

벤은 2% 안에 드는 인류일 것이다. 그는 종수나 해미에게는 말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일을 한다고 한다. 나중에 보면 그는 여자들에게 화장을 한다. 그리고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다른 듯하지만 이 두 가지는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게 그에게는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으로 보면 그는 쓰레기 소각자 혹은 미화원의 역할을 자임한다. 누가 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무엇이든 보기 좋아야 한다. 그는 주말이면 거대하고 잘 정리되고 위압감을 주는 성당에 나가 예배를 보고, 용산의 철거민 가족이 생존권을 위해 불에 타 죽고, 해체가 된 그림이 전시된 미술관 식당에서 화목한 가족모임을 하는 자이다.

 

반면 종수나 해미는 어떤 사람인가? 해미와 종수는 서울의 변두리 파주에 살았던 어린 시절 친구이다. 처음에는 그게 그들의 동질성이었다. 해미는 부정기적이지만 나레이터 모델로 먹고산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듯 몸으로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마임을 통해 인생을 배운 그녀는 없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느냐고 묻자, 없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사랑과 은총에 갈증을 느끼는 자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마른 우물에 빠져 은총이 내려오길 고대하다 종수에게 구원되었다. 그녀는 아프리카에 갔다가 벤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대다수의 우리 모습이다. 자본과 직장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어른이 되어 처음 만난 해미는 알바를 하던 종수에게 아프리카 여행의 꿈을 말한다. 그녀는 그냥 배고픈 자와 그레이트 헝거의 차이를 말하며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벤을 만나 돌아온다. 이후 그녀는 벤의 곁에서 지내게 된다. 벤은 그녀를 꾸미고 그의 권태를 달래는 도구로 만든다. 벤은 그의 친구들 앞에 그레이트 헝거를 흉내 내는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런 걸 즐긴다. 해미는 그가 빼앗을 가치가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 파주에 사는 종수에게 놀러 온 벤과 해미가 대마초를 나눠 피고, 그에 취한 혜미는 그레이트 헝거처럼 옷을 벗는다. 이를 본 종수는 벤과 떠나려는 해미에게 그런 건 창녀나 하는 짓이라고 모욕을 준다. 종수의 모욕에 의해 해미는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가 된 해미는 벤에게 치워야할 대상으로 변한다. 종수가 의심하듯 벤이 해미를 처리했다는 건 해미가 사라진 후 혜미의 방이 평소와 다르게 정리되어 있었고, 벤의 집에서 해미의 고양이가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종수는 소설가가 되려는 문학청년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그 어머니의 체취, 옷가지를 모두 태운 기억이 있다. 현재 아버지는 공무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재판을 받고 있다. 변호사는 피해자인 공무원에게 사과하고 반성문을 쓰면 선처하겠다는 데도 종수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해 그걸 하지 못한다고 종수에게 이웃의 탄원서라도 받아오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웃들에 의하면 살갑지도 않고 어울리지 않으며 고지식하고 원칙론자이다. 집을 나간 어머니는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다. 헤어진 후 오랜 만에 만난 아들에게 돈 얘기나 하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 따위는 없는 메마른 모성을 보여준다. 해미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해미의 빚 때문에 헤어져 살고 있고, 서로 간에 애정이 없어 보이다. 거기에는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벤이 종수에게 어떤 글을 쓰냐고 물었 때 종수는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종수에게 세상은 수수께끼이다. 어째서 있는 자는 일하지 않아도 돈이 생기고, 값비싼 페라리를 타고, 놀러 다니면서도 남부럽지 않게 가진 자로 살고, 세상을 꾸미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글을 써야할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이 사랑하던 해미가 사라지자 혜미의 행방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아니 사회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루한 권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화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를 알게 된다. 처움 종수는 자신의 마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을 듣고, 비닐하우스를 돌아다니며 현장을 잡으려 한다. 하지만 해미가 사라진 후 만난 벤은 종수의 마을에서 비닐하우스를 분명히 태웠노라고 말한다. 그제야 실제 하는 비닐하우스가 아님을 종수는 깨닫는다.

 

벤이 보기에 세상은 쓰레기가 널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걸 치우고 꾸미면서 재미를 느끼고 디자이너의 쾌감을 느낀다. 종수의 집도 어지럽게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있고, 외양간도, 헛간도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았다. 해미의 방도, 해미 가족의 식당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의 용산 철거민의 집도 그들의 집도 비닐하우스와 다를 바가 없다.

 

종수의 헛간에는 숨겨둔 칼이 있다. 여러 종류의 칼, 아버지가 숨겨둔 것인지, 아니면 종수가 숨겨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어지럽고 정리되지 않은 헛간 속에는 살의 가득한 칼이 숨겨져 있다. 결국 종수는 그 칼로 벤을 찌르고, 그의 피가 묻은 옷가지를, 그의 페라리까지 모두 태워버린다. 그는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만 남는다. 해미가 옷을 벗었던 거처럼 그도 옷을 모두 벗고 벌거숭이가 된다. 그들은 벌거숭이였다. 그들은 빛이 들지 않는 음지에 살며, 자본의 남근처럼 솟아오른 남산 타워의 유리에 반사된 빛이 겨우, 그것도 운이 좋아야 드는 그런 곳에 산다. 해미가 떠난 후 그 방에서 종수는 남산타워를 보며, 자위를 하는 자이다. 사랑하는 사람마저 자본에 빼앗긴 것이다.

 

영화에는 태우는 장면이 몇 장면 나온다. 다만 종수가 벤을 죽이고 그의 페라리를 태우는 것으로 끝이라면 1차적 의미로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벤의 집 화장실, 깔끔하게 각이 잡히도록 정리된 화장실에서 종수는 장신구와 화장용 가방을 본다. 그리고 거울을 본다. 벤도 그 화장실에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본다. 벤이면서 종수인, 종수이면서 벤인 인물, 종수는 그제서야 글을 쓴다. 그가 어떤 내용의 소설을 썼을까? 아마도 자신의 일을 쓸리라. 짐작할 뿐이다.


해미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서 종수에게 해미는 아예 없었던 인물일지 모른다.
우물 고양이 햇살 귤 해미는 없을 수도 있다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생충  (0) 2019.06.07
만우절과 [체코드림,2004]   (0) 2019.04.02
영화 암살  (0) 2015.08.17
스타워즈에 대해  (0) 2014.02.03
더 테러 라이브  (0) 2013.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