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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 문화를 꿈꾼다

바람분교장 2017. 11. 8. 09:39

포도나무 아래서 문화를 꿈꾼다

한승태

 

프레드릭 백 감독의 애니메이션<나무 심은 사람>은 장 지오노의 <나무 심은 사람>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황무지를 거대한 숲으로 만든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양치기의 기적 같은 삶을 다룬다. 작은 산골 마을은 숯을 만드는 일로 황폐화되고 사람들은 떠나간다. 그러나 혼자 남은 양치기 노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황무지는 몇 십 년 뒤 숲으로 변하고 마른 우물엔 다시 물이 나오고 계곡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떠났던 사람들은 어느새 돌아와 숲의 풍요로움을 즐긴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공기와 물, 그리고 땅과 나무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가꾸는 한 인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나는 문화가 양치기 노인의 나무 심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심는다고 금방 자라주지 않는 것이 나무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나무를 심지 못한다. 나무의 그늘을 자신이 즐기려는 사람은 나무를 심지 못한다. 적어도 몇 십 년 후를 바라보며, 다음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나무는 자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축제가 매년 열리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안시는 자연환경이 우리 춘천하고 비슷하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자연호수가 되었고, 나무들은 우거져 아름드리 숲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 호수의 맑은 물과 숲을 지키기 위해 1956년 깐느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부분을 떼어내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50여 년 동안 진행하면서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축제로 성장시켰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안시페스티벌의 초기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존 할라스 감독을 비롯한 세계 애니메이션 거장들과 안시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요즘 들어 위상이 흔들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최고의 페스티벌이었다. 우리와 다른 것은 페스티벌 자체가 너무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불친절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차분하고 안내가 자세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도 안시 전체에 흩어져 있어 영화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안시 시내 곳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것도 지리와 버스 노선을 잘 몰라 물어 물어가며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안시 시내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이것도 아이디어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게 했지만 내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루에 10Km 정도를 걸어 다녔으니!

어쨌든 이곳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심사위원들은 2002년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에 이어 2004년 성백엽 감독의 <오세암>을 장편부문 대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붉은 돼지)를 비롯해 프레드릭 백(나무를 심은 사람), 빌 플림턴(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뮤턴트 에일리언) 등의 스타 감독들을 선뵈었다. 세계적인 거장 빌 플림턴 감독 혼자서 거의 모든 그림을 다 그렸다는 셀애니메이션 <헤어 하이>를 비롯해, 대니얼 로비쇼드 감독의 <서기 3000년의 피노키오>, 조제 포조 감독의 <엘시드>, 이탈리아의 <토토 사포레와 마술이야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대상의 영예를 안았기에 <오세암>의 수상은 더 의미가 크다.

<오세암>의 수상 요인은 스토리가 탄탄하고, 동심을 세밀하게 잘 표현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실은 근래 개봉된 몇몇 한국 애니메이션 작품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세계적으로 3D애니메이션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으나, 정작 작가들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내용이며, 그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할 도구로써 3D를 사용하였다고 인터뷰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3D는 표현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또 다른 주요 경향은 역시 컴퓨터애니메이션과 3D의 강세다. 사실 이젠 컴퓨터애니메이션이란 용어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컴퓨터 2D 또는 3D가 보편화됐다. 간혹 전통적인 드로잉 방식의 2D가 사라져간다는 걱정도 들려오지만, TV가 보편화된 이후에도 책이 사라지지 않았듯 애니메이션의 각기 다른 테크닉들도 양립하며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도구가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혁신적으로 쉽게 만들다보니, 올 신청작만 해도 단시간에 별다른 고민 없이 값싸게 만들어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이 많아졌다.”는 안시페스티벌 예술감독인 세르지 브롱베르의 걱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수상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단편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로렌조Lorenzo>,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라이언Ryan> 그 밖의 아드만 스튜디오의 클레이애니메이션 시리즈 <동물원 인터뷰> <고양이냐 개냐Cats or Dogs?>, 독일 작품 <알레라이라우Allerleirauh: 온갖 종류의 털이란 뜻>가 최고상을 수상했다. <라이언>과 김세종 감독의 <축 생일> 등에 대한 주목이 애니메이션의 표현 영역을 넓혀가는 3D애니메이션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안시의 관심을 반영한다면, <동물원 인터뷰> <알레라이라우> 등의 수상은 수공업적인 기법과 장인의 손맛을 중시하는 안시의 오랜 전통을 확인케 했다.

또 하나의 수상 요인은 이번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시각이 휴머니즘 쪽으로 기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개막작으로 초청된 일본 콘 샤토시 감독의 <동경 대부>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다. <퍼펙트 블루><천년여우> 등 극사실주의 영상과 독특한 심리묘사로 이름난 콘 샤토시 감독은 <동경대부>에서 이전의 작품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인공들은 동경의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노숙자들이다. 이야기는 이 노숙자들이 엉겁결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아기의 부모를 찾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우리 애니메이션은 이번 수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2002년에 이어 또 새로운 나무를 심은 셈이다. 이렇게 심은 나무가 잘 자라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아니 더 나아가 문화산업은 포도나무 아래 선 여우의 입장과 같다. 포도는 크고 먹음직스럽다. 포도를 산업적 이익이라고 가정해보자. 물론 문화산업에 산업적 이익 외에 다른 것도 많지만 단순화시켜보자. 그럼 저 포도나무의 열매는 누가, 또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빨리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문화 상품으로서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우선 세계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화적 저항감이 적은데다 시류를 잘 타지 않아 해외 수출에 실사영화보다 더 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애니메이션은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 영화, 캐릭터, 모바일 시장 등 연관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어, 우리가 우선적으로 투자할 만한 산업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가올 세기가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란 시대의 조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년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문화의 산업적 중요성을 말하곤 한다. 또한 문화산업을 위하여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데 선뜩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산업에 기초 문화는 실종되고 어느새 산업만 남아서 돈 벌기에 눈이 벌겋다. 이름만 빌려준 꼴인 문화는 매번 돈이 안 된다고 내팽개쳐진다.

그러나 문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산업이란 모래성과 같다. 우리는 남의 나라 포도나무만 바라보며 언제까지 침을 삼킬 것인가. 달콤한 열매만을 바라며 언제까지나 포도나무 아래의 여우처럼 겅중겅중 뛸 것인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도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짓고 큼지막한 청사진을 내걸지만 쉽게 지쳐버린다. 이는 문화산업의 기본이 되는 문화를 산업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방 성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재정이 열악한 지방정부는 그 조급함이 더 심하다. 성급한 결과주의가 낳은 허무주의가 판을 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돈 벌 생각을 버리고 우선 기초 문화에 투자해야 한다. 국민들의 문화의 향상이 우리의 내일을 좌우할 것이다. 산업을 말하기 전에 문화를 말하라. 문화가 익으면 포도는 자연스레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나무를 심어야 한다. 지금 당장이 아닌 몇 십 년 뒤에 싱그럽게 익을 포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한승태

68, 강원도 내린천에서 태어나 강원대 불문과와 국문과 대학원 과정, 2002<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애니메이션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