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국수_백석 본문

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국수_백석

바람분교장 2017. 1. 2. 11:52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시골 식당의 한 구석진 삿방에 앉았다. 거기에는 여전히 올해 추수한 쌀과 들깨며 참깨, 수수며 메밀, 메주콩, 옥수수 같은 것들이 널려있고, 철 지난 이불도 말아 두었다. 갑자기 불을 들이는 방에서는 들쿠레하고 히스무레하고 슴슴한 뜬 냄새들이 나는데, 밖에서는 국수를 끓이고 동치미와 김장김치를 통째로 먼저 들인다


      그러면 다시 문을 열고 뽀얀 흰 김 속에 분주한 주인을 향해 국수를 삶은 물을 달라고도 하고 소주도 먼저 달라고 청하는 것인데, 아득하다. 이 앞뒤 없는 오랫 적 풍습을 21세기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는 사회에서도 맛보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단고기도 좀 있는데 먹어보겠냐고 슬쩍 마수도 걸어보고, 벌써 서너 잔 술에 불콰해진 손님들은 두말하면 잔소리라 장단도 맞추는 것이다.  

    

     이제 눈이라도 와주면 금상첨화겠다. 다행히 데워지는 방바닥에 엉덩이를 지지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람은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듯 이 반가운 맛도 이어가겠다. (한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