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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브레히트_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바람분교장 2016. 9. 26. 18:12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이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겨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멸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의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김광규 베르톨트 브레히트 詩集 <살아남은 자의 슬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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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다.

가을은 얼마나 붉고 아름다운지, 또 하늘은 얼마나 깊고 푸른지, 밤하늘 아래 불빛이 얼마나 따스한지, 나뭇잎을 떨구고 가는 시간은 또 얼마나 숭고한지,

 

나도 안다.

이 땅의 토질이 얼마나 오염되었고, 바람은 또 얼마나 거칠고 숨쉬기가 힘든지, 젊은이가 사랑하기 얼마나 힘든지, 아이들은 공부하기 얼마나 힘든지, 사랑하는 가족들의 방 한 칸이 얼마나 위협받고 있는지,

 

나도 안다.

사람으로서 살기 힘든 시절이다. 학생들이여! 젊은이여! 어머니 아버지여!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 건 당신들이 못나서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똑같은 선에서 경쟁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시가 쉽게 쓰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시인을, 자신이 쓴 아름다운 서정시조차 부끄러워했던 시인을, 온 땅이 아픈데 온 동포가 아픈데 어떻게 서정시가 나오겠는가? 그래도 써야 한다면 아름다운 이 땅에서 이리와 승냥이 떼를 몰아내는 시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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