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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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沙平驛) 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창작과 비평사
무림(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
―무림 일기1
유하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하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천마대제가 죽자 무림존패의 위기를 느낀 동창서열 제오위 공두일귀 동문 혹은
낙성천마를 기습, 금나수법으로 제압한 뒤 고수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무력 18년 겨울, 고금성 주위엔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천수신마, 건곤일검, 남해일노 등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이 암암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벽안의 무사들에게 빌린 천마벽력탄과 육혈포를 가지고
동창서열 제삼위 무적금괴 승룡을 제압 중원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역의 천마벽력탄 앞에서 무적금괴의 철풍장 정도는 조족지혈이었다
무력 19년 초봄, 칠성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백골계곡에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 무렵 하난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고의 소유자가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찬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천마대제는 비명에 갔지만 강자존 약자멸!
이 무림의 대원칙이 깨질 것을 우려한 광두일귀 및 일부 뜻있는 고수들은
무력은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앞에 숙연해하며
한층 겸허하게 무공연마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무협지 작가와의 대화
무림일기2
오늘은 관철루에서 죽엽청을 홀짝이다
개방대학 시절 절친했던 사형 한분을 만났다.
우중일배주라(雨中一杯酒), 운치가 있구만 껄껄
사실 무림의 삼류대학 개방에서 만나
사년간 소화자처럼 죽엽청만 마시며 취권을 배웠던 신세였지만
그도 나도 한땐, 소림대학의 견고한 나한진을 뚫기위해
수십만냥 들여가며 무공과외도 했고
내공을 몇갑자씩 증진시켜준다는 비급도 여러권 읽었다
소림대학 입산해야 달마역근경도 배우고
일류검객이 되어 출세도 하는 중원땅에서,
무림 제일문 졸개들에게 쫓기며 터득한 경공술 따윈
아무 쓸모가 없다며 광소를 날리던 사형
그는 대학을 하산한 뒤 기껏 무협지를 쓰고 있었다.
어제는 백명을 죽이고
오늘은 고민고민하다가 이백명 죽였어
죽엽청이 거나하게 들어거자 그는
귀기어린 안광을 번득이며 전읍입밀의 수법으로 말했다.
사형은 아마도 하남의 혈겁에 대해 쓰는 것 같았다.
마도의 패왕 광두일기의 공수무극파천장에
칠공의 피를 쏟으며 죽어간 하남의 수많은 백성들
허지만 사형, 소설은 현실의 복사가 아니잖소? 절제가...
무슨 닭뼈다귀 같은 소리냐
무협 소설은 무림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그 뜻이 있어
내일도 모레도 애꿎은 자들 몇백명 더 죽어야,
내가 쓰는 무협지가 끝이 날지...
말을 마치자 사형은 단전에 진기를 끌어모은 후
능공허도의 경공술로 섬전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비가 그치다 오늘도 관철루 부근에선 어김없이
무림 제일문 무사들의 최루장풍 출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전서구
- 무림일기 5 -
무림맹은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낸다.
무림 비무대회가 열리면
무림제일문보다 소림파나 무당파가 우세
불쾌한 표현이니 비판하라
오늘 있는 공심대사와 하남일존의 비무 사진은 싣지말 것
신무림방에 소림파세자들 화염장풍 쏘다
보도 보류 바람
분근착골 육골분시 같은 과격한 표현보단
단순히 혈도제압이라 순화시켜 쓸 것
중원에 애이주(愛夷酒) 환자 일만명
사실무근이므로 보도하지 말 것
사천표국 색마 검귀의 채음보양술 사건은
단순히 차력음양대법이라 쓸 것
죽엽청과 삶은 만두 먹는
무림 맹주 사진 크게 실을 것!
(말 안듣는 무협신문은 고량주 잔뜩 줄 것!)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 년간 하루 십 킬로의
로드웍과 섀도우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엑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 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불의 뷔페
소망교회 앞, 주 찬양하는 뽀얀 아이들의 행렬, 촛불을
들고 억센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태초에
불이 있나니라, 이후의-
칠흙의 두메 산골을 걸어가다 발견한,
그 희미한 흔들림만으로도
반갑던 먼 곳의 등잔불이여
불빛을 발견한 오징어의 눈깔처럼
눈에 거품을 물고 돌진 돌진
불 같은 소망이 이 백야성을
만들었구나, 부릅뜬 눈의 식욕, 보기만 해도 눈에
군침이 괴는, 저 불의 뷔페 色의 盛饌을 보라
그저 불밝히기 위해 심지 돋우던 시절은 지났다
매서운 한강 똥바람 속,
촛불의 아이들은 너무도 당당해 보인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이므로
風前燈火, 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이젠 바람도 불과 함께 놀아난다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
불의 소망 근처에서
불의 구린내를 빠는 똥파리의
윙윙 날개 바람
바람 속으로 빽이 든든한
촛불들이 기쁘다 구주 기쁘다
걸어간다, 보무도 당당히, 오징어의 시커먼 눈들이
신바람으로 몰려가는, 불의 뷔페 파티장 쪽으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
─ 어떤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까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 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파인 배꼽 배……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
유령처럼 축구를…… 해골바가지…… 난 자식아, 여기 최후의 원주민이야
그럼 난…… 정복자? 안개 속 한남동으로 배추 리어카를 끌고 가던
외팔의 그애 아버지…… 중학교 등록금…… 와르르 무너진 녀석의
펜트하우스, 바람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
그 넓은 배나무숲에 가야 했다 그의 십팔번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
휘파람이 흐드러진 곳에 재건대원 복장을 한 배시시 녀석의 모습
그 후로부터 후다닥 梨田碧海된 지금까지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디서
배맛처럼 떠오르는 그애 생각에 배나무숲 있던 자리 서성이면……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수많은 배들이…… 지금
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배로 한꺼번에 쏟아져들어가 배나무보다
단단한 배포가 되었을까…… 배의 색깔처럼…… 달콤한 불빛, 불빛
이 더부룩한…… 싸늘한 배앓이…… 바람부는 날이면……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5
─ 호텔, 그린그래스
산다는 일이 뭐 뾰족한 일이 있으랴 넥타이 매고
소주잔 돌리며 지글지글 삼겹살이나 뒤집는 일 외에
뾰족한 일 찾으려다, 노충량이는 뽕 먹다 빵에 갔고 기어이
난 누에 같은 시인이 되었다 참 누에는 뽕 먹고 살지
언어의 뽕잎 갉아먹으며 내가 황홀해지는 시 한 편 쓰고 싶었다
악마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정말 내가 뽕 가는 시 한 편 쓰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노충량과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말로가 다를 뿐? 그럴까? 카메라의 뽕을 먹고 사는 배우들
화려한 옷의 뽕을 먹고 사는 모델들 예술이냐 외설이냐?
히로뽕 같은 극단의 삶을 사는 히로인들 아으 언제나 극단은 위험하다
극단적인 것치고 퇴폐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이곳은 극단주의자들의 거리다
삶 속에서 뭔가 뾰족한 것을 갈구하는 자들의 거리다
뾰족한 건 파괴적이다 칼을 보면 찌르거나 찔리고 싶다는 한 생각,
하여 그들은 뽕 같은 은유나 상징을 사랑한다 신문 사회면과
문화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나도 언어의 뽕이 없었더라면
깡패가 됐으리라, 뽕의 은유로 빵빵한 길이여 이곳을, 지나는
그 누가 사계절 뾰족하게 좆만 꼴리는 거리라 노래하겠는가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사계절 모두 봄봄봄
웃음꽃 피니까- 카수 문희옥이 은유의 새처럼 지저귄다
외롭거나 쓸쓸한 사람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찾아드는, 저곳을
그 누가 낮씹하는 곳이라 부르겠는가 오예스 오예스 호텔 그린그래스
골프장의 잔디 위에서 단련된 허리, 푸른 잔디처럼 출렁이는 물침대
완곡하여라 호텔 그린그래스 어느새 저 불야성이
누에 같은 나마저 유혹한다 강력한 언어의 뽕을 먹인다
고향의 푸른 잔디와 체리빛 입술의 메리가 여기 준비돼 있어요*
뾰족하여라 호텔 그린그래스
*탐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
유하『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하철에서1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지하철에서6
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5초마다 세계가 열렸다 닫히는 인생들을
우르르 온몸으로 부딪혀 만난다.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 비평사, 1994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홀린사람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 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서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같은 가늘은 울음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위로 들이친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 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 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엄마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89.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수도전기공고와 서울예대 문창과를 마쳤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울씨의 일일』(1990), 『자본주의의 약속』(199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9) 등을 펴냈다. 이밖에도 공저로 『문학을 꿈꾸는 시절』(2002)이 있으며, 현재 강화도에서 살면서 안양예고 문예교사로 일하고 있다.
동막리 가을
함민복
내장 훑어버린 몸 곧게 펴고
도르래 줄 타고 장대 끝까지
망둥이 님 숭어보다도
더 높이 뛰어오르셨습니다
감나무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눈 사 람
굴러 굴러
몸 만들었구나
차고 둥근
물알 두 개
평편하게
한세상 살지 않고
끝 찾아
다시 펼쳐 놓고 싶은
눈사람
사람눈
섬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동막리 바다로 가는 길
바다로 내린 마니산 자락에 포구로 가는 길이 있네
길이 끝나는 산모퉁이에 상여보다 작은 곳집이 있고
바다로 가려면 그 길을 지나야 하네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그 너머를 바다라고 부르네
가끔 제방이 터지기도 하네
달맞이꽃 피어나는 제방길을 사이에 두고
산 사람은 배를 타고 바다로 가고
죽은 사람은 상여를 타고 산으로 가네
밀물과 썰물을 타고 오가는 망둥이여
육지도 바다도 아닌 뻘밭의 세월이여
두 개의 포구가 있는 길이여
푸르고 짠 길
이 길은 푸르고 짜다
길속에서 먹을 것을 잡아 올린다
이 길엔 깊이가 있어
길에 빠져 죽기도 한다
소리 내며 제 길을 오가는 길
위에서 밥을 몇 번 해먹으면
두려움이 가시기도 하는
길과 같이 흔들리며 낚시를 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온 지혜를 다 짜
배와 줄다리기 하던 망둥이가 뽑힌다
얽히고 설켰던 길의 가닥 중
망둥이 길 하나가 뜯어져 나온다
길의 배를 따고
물에 실을 넣고 불로 길을 끓인다
길의 살점을 발라 먹는다
먹는 것은 길의 살점뿐인데
살점들은 먹지 못하는 길의 뼈에 붙었으니
길을 먹은 힘으로 또 길을 가야 하는
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린다
이 길은 늘 푸르고 짜다
승리호의 봄
그물은 다음 사리에 매기로 하고
그물 말뚝 붙잡아 맬
써개말뚝 박고 오는데
벌써 경진 엄마 머리에서
숭어가 하얗게 뛴다
그물 매는 것 배우러 나갔던
나도 신이 나서
경진 아빠 배 좀 신나게 몰아보지
먼지도 안 나는 길인데 뭐
게를 먹다
잘 해보자고
잘 할 수 있다고
앞뒤로의 생활이 딸리면
좌우 옆으로라도 빨리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음을 가훈으로 한,
축구 골키퍼 같은, 게를 먹는 새벽
뼛속에 살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를
뼈에 살을 붙이고ㅗ 살아가는 내가
파먹는다
뼛속에 살을 숨기고 살아가는 족속들은
왠지 슬프다는 생각에 젖어
그 슬픈 족속을 안주로
뼈에 쌀 한 가마니 무게의 살을 단
생활이 소주에 젖는다
살만 있는 공기여 물이여
뼈만 남아 있는 역사여
뼈가 없어 홀로 일어설 수 없으면 수목의 등줄기라도
잡고 일어서는 칡넝쿨이여
삶의 분노 태풍이여
마음의 뼈를 발라낸 광란이여
허무에 독이 오른 물렁가재여
성기 끝을 벗어나는 뼈도 살도 아닌 정액의 두근거림이여
가위에 잘린 가벼운 게 다리들
빨며, 소주를 마신다
슬프게 살아 간이 저절로 배어 있는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시집 중에서
스승을 뼈째 우득 우드득
혼란스럽다
보일러에서 기름 방울에 젖고 싶다고 귀뚜라미가 운다
아카시아 나무에서 샴푸 냄새가 쏟아진다
김포평야에 논 밀고 풍년마을이란 아파트가 들어선다
사람이 물길을 막고 사람이 상하자
옛사람들처럼 큰물이 났다고 하지 않고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상처라고 하루 종일 떠들어댄다
고궁과 길거리 향로와 항아리에 담배꽁초가 쌓인다
민중의 지팡이란 말로 허약하지 않은 민중을
허약하게 만들어놓는다
자연보호란 화두로 자연을 약화시켜놓고
갓난아기가 아버지를 보호하겠다고
떠들썩 운동이 전개되는 이 시대는,
여름의 가르침 2
낫 시퍼렇게 갈아
논두렁을 깎는다
풀에 묻힌 콩 대궁 조심하며
독뱀 튀어 오르면 모가지
댕강 날릴 생각도 하다가
땀 훔치며
허리 펴니
풀 향기가 사방을 에워싼다
몸 잘린 풀들이
향기의 비수를 날린다
향기롭다니!
핏속에 잠재된 잔인한 감각의
멱을 일순 따버리는
낫보다 시퍼렇게 날 선 풀 향기
긍정적인 밥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옥탑방
눈이 내렸다
건물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 단면으로 잘려 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초혼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린다
귀향
낯설지 않던 도시를 떠돌다
낯선 고향에 돌아왔네
이 땅에 이쯤 살았다면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
내 나이 수만큼은
흙 속에 묻어주었을 텐데
문이 문을 여는 빌딩을 기웃거리고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죽은 고기를 씹고
똥물 내리는 물소리나 들으며
풀 냄새라곤 담배 냄새나 맡다가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사십이 다 되어 홀로 돌아와
살아온 길 잠시 벗어 보네
낯선 고향에서 쉬이 잠 오지 않네
길의 길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글의 소리 듣는다
길
식물들은 살아온 몸뚱이가 가본 길이다
그도 죽어 길이 되었는지
골목길에 검은 화살표로 이정표를 남겼다
질긴 그림자
태양이 어서 일터로 나가라고
넥타이를 매주듯 그림자를 매주었다
농부들이 들판에서 그림자를 파내고 있었다
달이 뒤에서 앞에서 자신의 포즈까지 바구며
뒷모습만 나오는 흑백 그림자를 찍어 주었다
올빼미가 제 그림자가 되어준 들쥐를 내리 쪼았다
불빛 속에서 그림자가 화들짝 튀어나왔다
죽음만이 실재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죽음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타올랐다
그림자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그늘 학습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 더 앉아 있어야겠다
전구를 갈며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죄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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