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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의 시 / 엄승화 본문

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미개의 시 / 엄승화

바람분교장 2012. 9. 10. 12:22

 미개의 시

 

                          엄승화 
   
  튀어오른다. 머뭇거리는 시간의 휘장을 연다. 성년이 된 여인은 건강하고 단순하다. 응시하는 어둠 속 조종은 평화로이 울리고 붉은 정령들의 음악 짐승들은 섭리를 지켜 포효한다. 손톱 부서지고 새들은 알을 쪼아먹고 살찐 땅으로 흐르는 과즙 여인의 젖꼭지에 묻어 있다.
 
  오후는 끝없이 작열하였다. 태양으로 하여 청년의 이마 골짜기보다도 깊고 가장 화려하였던 꽃잎을 문신으로 새긴 처녀들 지붕 위에서 타악기처럼 적막히 소리지른다. 한때 아버지였던 사나이들 앵두나무 꽃가지에 매달려 지평선을 이루며 놀고 있다.
 
  이제 해 지는 언덕에서 불탄다. 무덤이 있는 숲의 상처와 습기들 핥던 사랑 종탑 위의 먼지 높이 날아 허공을 벨 때 아름다운 여인이 쓰러지는 것은 쓰디쓴 자유를 누림이라 밤이 오면서 지평선은 동트는 곳이 되었고 어둠의 짙은 광채 오랜 세월 공처럼 튀어올랐던 무릎에 휘감길 때 붉은 지렁이는 그곳에 있어 알 수 없는 세계의 뜨거움과 싸우고 이긴다.
 
  
엄승화 - 1958년 강원도 영월 출생. 시집 청하『온다는 사람』이 있음.   

인공의 기미가 전혀 없는 날것의 자연을 탐미적으로 그린 시다.  ‘붉은 정령들’ ‘가장 화려하였던 꽃잎을 문신으로 새긴 처녀들’ ‘해지는 언덕에서 불탄다’……. 붉은, 붉다 못해 검붉은 색채감을 곳곳에서 내뿜으며 죽음이나 늙음마저도 화사하게 만든다. 절정의 단맛을 향해 치달아가는 한여름의 검붉은 자두처럼 한젊음이 잉잉거리는 신열로 탱탱하다. “아, 나는 얼마나 젊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 속의 여인이 스스로 매혹되어 저도 모르게 뽐내며 ‘적막히’ 선포하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오랜 세월 공처럼 튀어올랐던 무릎에 휘감길 때 붉은 지렁이는 그곳에 있어 알 수 없는 세계의 뜨거움과 싸우고 이긴다.‘
오래 견딘다는 건 가장 힘든 싸움. 너는 싸웠고, 이긴 것 같다.
           -- 황인숙 시인 소개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