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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이르는 죽음, 사막에 이르는 삶<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본문
마이크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사랑에 이르는 죽음. 사막에 이르는 삶
Written by 한승태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기 갔었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는 한 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
-박정대의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중에서
이 영화의 플롯은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와 창녀간의 운명적이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로 매우 단순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치밀한 스토리보다 죽어가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정서가 풍부한 영화로써 전편에 흐르는 음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팅의 재즈와 발라드의 조화는 캐릭터의 분위기와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래서인지 이 음악에 대사가 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고 죽고자하는 한 남자의 정서에 넋두리 같은 대사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더구나 그는 늘 취해 있지 않던가, 분명한 것과 분명하지 않은 것과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이 그의 상태이다. 따라서 취해 음악에 부유하는 주인공은 음악 속에서 흐느적거린다. 음악은 벤의 상태에 따라 흘러가고, 정지하고, 몽롱해지고, 격렬해진다. 취한 그의 상태가 음악이다.
영화의 1장에서 벤은 한때는 잘 나가던 영화 시나리오 작가였다. 영화에 조금씩 들어나는 정보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죽었는데, 아내와 다투고 아내가 떠나버려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지, 알코올 중독이 되어 아내가 떠났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소홀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이것이 그의 내적갈등이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제 그는 영화사에서 실직하여 퇴직금을 받아들고, 모든 것을 정리하여,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차를 몰고 간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고, 존재 이유마저 상실한 벤은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죽으려는 것이다. 그는 술을 줄이는 것보다 숨 쉬는 것을 더 줄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즉, 술을 마시기 위해 자살하려는 사람이다.(이에 반해 자살하기 위해 술 마시는 사람은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가)
한편 라스베이거스에는 세라가 노련한 창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몸 파는 일을 해왔고, 나름대로 최선의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바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학적인 유리라는 포주가 있어 고통을 받지만 그런 그를 가엾게 생각하는 천사다. 유리마저 갱단으로부터 살해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녀는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 영화는 곳곳에 세라를 인터뷰하는 듯, 다큐멘터리 형식을 시도하여 세라의 그때그때 감정과 상황을 전한다. 하지만 어투로 보아서는 영화의 진행에 맞춰 현재형으로 진행되는데, 과연 누구에게 털어놓는 인터뷰일까?
2장은 이들이 만나면서 시작한다. 벤은 그런 세라에게 이야기를 나누며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 세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남자,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해줄 것 같고, 굶주린 욕망의 대상이 아닌, 외로움에 굶주린 벤을 보면서 내적 균열이 생긴다. 그로인해 이유 없이 그가 생각나고 그를 찾아다니게 된다. 결국 이들은 서로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벤이 술을 마시다 죽으려는 것을 간섭하지 않고, 세라의 직업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두 사람의 서로의 현재 상태를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동거를 시작한다.
세라는 벤과의 동거를 축하하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벤에게 휴대용 양주병을 선물한다. 두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에 온 후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지만 불행의 조짐도 드러난다. 그들 생애에 있어 가장 행복했을 사막에서의 며칠 밤을 보내고 돌아온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에 약속했던 조건을 어기게 된다. 세라가 고통스러워하는 벤에게 병원에 가보라는 권유를 하면서 벤과의 관계는 심각해진다. 세라가 정말로 벤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벤은 일부러 그녀를 떠나기 위해 귀걸이를 선물하면서도 모욕을 하고, 집안에 또 다른 밤거리의 여자를 불러들인다. 그런 벤의 행동에 세라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세라는 단지 자신의 옆에만 있어 달라고 애원하지만, 집을 나간 벤에게서는 연락도 없다.
3장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음 직전에 결합된다. 세라는 질이 나쁜 대학생들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한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벤의 연락을 받은 세라는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다. 벤은 이미 죽음 직전에 세라와의 그날 밤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을 나눈다. 단지 몸으로 하는 섹스가 아닌 외로움의 허기를 달래는 섹스, 외로움이 배어나와 몸과 마음이 위로 받는 결합을 이룬다. 외로운 영혼의 위로자, 천사의 손길로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을 감싸는 따스한 빛처럼 그녀는 벤을 감싸 안는다.
뿌리 없는 사람들의 천국, 라스베가스. 벤도 그의 뿌리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세라 또한 누구인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유리 또한 라트비아 출신이지만 대략 사기꾼으로 살아왔을 거란 짐작만 될 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세라와 어떻게 만났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들이 뿌리 잘린, 떠돌이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라스베가스에서 만났다.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진 도박과 유흥의 도시,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인간들의 사막, 그곳에서 서로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막은, 라스베가스이고, 라스베가스는 사막이다. 사막에서의 며칠 밤은 이들에게 오아시스였지만, 그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오아시스도 여행자들을 위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자들의 임시 거처이다. 따라서 벤은 사막에서 구원을 받고자하는 구도자이다. 무엇으로 술로, 죽음으로, 여자로, 그럼 세라는 벤을 구원할 천사인가! 과연 그들은 라스베가스를 떠날 수 있을까? 당신들이 빠진 삶이라는 거대한 밑구멍에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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