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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실수 열정의 비극 <아마데우스>

바람분교장 2008. 8. 23. 14:57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신이 만든 실수 열정의 비극, 살리에리



Written by 한 승 태

 

 


……그러나 내가 노래하는 양을 즐겨 앉아 듣고,

나에게 웃음을 던지며 희롱하면서

나의 금빛 날개를 활짝 젖히고는

내가 자유를 잃어버렸음을 놀려댄다. 


……어리석음이란 하나의 끊임없는 미로,

얽힌 뿌리들이 거기에 빠졌던가!


……이제 더 이상 사제가 목쉰 소리로 기쁨의 아들들을 저주하지 않게 하라. 동포들이 서로 경계를 짓고 지붕을 세우지 않게 하라. 바라기만 할 뿐 행하지 않는 창백한 종교적 음욕을 처녀성이라고 부르지 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다.                       


- W.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중에서 



영화의 처음은 1823년 눈보라치는 밤, 노인이 된 살리에리가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모차르트를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하여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살리에리의 죄를 고백 받고자 젊은 신부가 찾아온다. 신부에 대한 모멸적인 감정을 결코 숨기려 들지 않았던 살리에리가 젊은 신부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영화는 천재성으로 상징되는 모차르트와 열정은 있으나 재능에 있어 뛰어나지 못했던 평범한 예술가 살리에리의 갈등, 그에 따른 신에 대한 증오가 주요 내용이다.

 


 

이태리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비인에서 명성이 높던 궁정음악가였다. 소년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그는 장성하여 음악애호가였던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2세의 총애를 받는 작곡가로 출세한다. 젊은 날 신이 그에게 주신 음악적 재능에 깊이 감사한 살리에리는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충실한 머슴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살리에리의 명성도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한 젊은이, 모차르트에 의해 모든 것이 짓밟히고 만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자신만만함으로 살리에리를 모욕하고, 그의 사랑하던 애인까지 가로챈다. 그러면서 천박하고도 오만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며 흥청거린다.

 


 

이봐, 살리에리! 이해하시게. 아니면 패 죽이든가, 그것이 예술가의 자유분방 아니던가!


살리에리는 그러한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고 그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그는 신이 자신의 표현 도구로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차르트를 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을 위한 음악, 신을 찬미하기 위한 작곡을 해왔는데, 신은 자신에게 음악을 볼 줄 아는 안목과 열정만 주고 모차르트처럼 재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밖에 주지 않은 신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며, 지옥의 복수심이 그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고, 그는 신봉하던 신상을 불태워버린다.


따라서 그의 갈등은 모차르트를 능가할 재능이 없다는 것과 더 괴로운 사실은 모차르트의 재능을 자신은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안목을 주지나 말던지. 그런 살리에리는 창작자이지 평론가가 아니니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살리에리는 신의 피조물인 모차르트를 감시하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살리에리의 패배는 더욱 처절하게 확인된다. 그의 형편없는 재능만 더욱 확대되어 드러날 뿐이었던 것이다. 얄밉고 그러면서도 작품을 들으면 부럽고, 돌이켜 생각하면 신에게 분노하고, 나는 뭐란 말인가?

 

 

가장무도회에서 아버지를 검은 옷의 마왕으로 변신시켜 같이 참가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는 화를 내며, 후원자가 있는 짤즈버그로 돌아가자고 제의한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막무가내로 파티에만 열중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서둘러 결혼한 콘스탄체와 점점 방탕한 생활과 무절제로 빈곤에 고통 받는다. 

 


 

아버지와 아내의 불화로 아버지는 떠나고, 모차르트는 고통스럽고 점점 쇠약해져간다. 병마로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자책감에 시달린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도 아들을 데리고 온천으로 떠나자, 몸을 더욱 혹사시킨다.


이를 지켜본 살리에리는 예전에 파티에서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입었던 마왕 의상을 입고 진혼곡(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고, 계속 독촉한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쇠약해 있던 모차르트에게 고통을 준다. 살리에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모차르트에게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리도록 한 것이다.

 


 

<마술피리>을 공영하던 중 피폐해진 모차르트는 쓰러지고, 살리에리가 그를 집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그의 작곡을 가로채려는 음모로 그가 죽기 전에 레퀴엠을 쓰도록 시킨다. 그러나 죽어가는 모차르트의 곡을 대필하면서 그는 절대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의 재능에 자신이 모차르트를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열패감만 얻는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마지막 자신의 곁에 남은 살리에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결국 죽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 동안 자신의 버릇없는 행동에 대해 사죄까지 한다. 관객들은 이미 살리에리가 신부에게 고백하였듯이, 그의 작곡을 빼앗아 갈까봐 내내 긴장하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작곡을 대필하는 동안 교차편집으로 떠났던 그의 아내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아내 때문에 곡은 빼앗기지 않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저주받는 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듯 레퀴엠은 살리에리가 원했듯이 모차르트 자신을 위한 진혼가가 된다.

 


 

하지만 관객들은 열정은 있으나 재능이 없는 살리에리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이는 주인공이 모차르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행에 몰아넣은 살리에리를 동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우리들은 다 받아들인다. 이 둘은 정말 난감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살리에리는 살리에리대로 충분히 우리에게 호소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흉계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이러니로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봐, 모차르트! 살리에리를 조심하라고, 믿지 말라고!


그러나 살리에리 또한 진정 음악을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도 모차르트의 재능을 잘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관객들은 누구보다도 동정적으로 대한다. 따라서 같은 예술가로서 자신이 부여 받은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고통을 우리들도 느끼게 된다.

 


 

천재 모차르트를 마주한 범용(凡庸)한 예술가 살리에리의 질투와 고뇌를 통하여 우리도 살리에리와 같은 인간임을 발견하게 해 준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수많은 평범 속에서 몇 안 되는 천재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 그러나 그 뛰어남, 노력으로 극복될 수 없는 천재에 대한 평범의 대응이 아마데우스가 다루고자 했던 가장 근본적인 주제이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죄를 사하노라. 살리에리, 그대의 죄도 사하노라! 삶은 모두 신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