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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초상,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본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80년대의 초상, 박두만과 서태윤
by 한 승 태
우리나라에, 우리나라여 / 내가 더 젊었을 때는 / 이 지구에서 하고많은 나라들 가운데 / 어쩌면 이런 거지같은 나라에 태어났는가 / 억울해 했던 적이 있지/……나뭇잎만한 새가 나의 행선지를 占쳐준다. //
……젊음이 죄야. 젊음 놈들은 모두 용의자야. //
지하도에서 가는 길을 묻는 자에게 새占을 쳐주는 늙은 예언자. //
불꺼! 1309호 불 안 끌거야? 시발년아 불 안 끌래? 방위병이 //
가게 문짝을 발로 걷어찬다. 먹구름 밑 항공로를 긴 혀로 핥는 探照燈. // 그대들은 아버지 없는 세대, 후레자식들이다./ ……내 좆으로부터 태어난 미래여, 덤벼라, 나에게! //
……그대, 보았어? 온 몸에 신나를 끼얹고 대기권으로 들어오는 꽃다운 流星을. / 아아 역사여, 뇌성번개여, 피뢰침 밑으로 들어간 자를 쳐라!
-황지우의 <나는 너다> 중에서
영화의 1장은 1986년 경기도의 한 시골.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일대는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발생지역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수사본부는 구희봉 반장을 필두로 지역 형사 박두만과 조용구, 그리고 서울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 형사가 배치된다. 시골경찰서로 자원하여 찾아오는 서태윤을 범인으로 오해해, 박두만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면서 두 인물은 처음 대면한다. 박두만과 서태윤이 하고자하는 일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일이지만, 이런 공동의 목표를 위해 영화는 두 형사의 서로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박두만은 죄가 없는 엉뚱한 사람들만 잡아다 족치며 자백을 강요하여 범인을 만들어낸다. 육감과 발로 뛰는 수사를 믿는 박두만은 백광호라는 어수룩한 인물을 범인으로 확신하고 증거까지 만들어 현장검증을 벌인다. 하지만 매스컴이 몰려든 현장 검증에서 용의자가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구 반장은 파면 당한다.
영화의 2장은 새로 후임으로 신동철 반장이 부임한다. 서울에서 자원하여 내려온 서태윤은 그간 살인사건의 서류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비가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 대상이라는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찾아낸다. 하지만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박두만과 서태윤 두 인물은 사사건건 서로 다른 수사태도와 세계관의 차이로 부딪치게 된다. 하지만 이 두 인물이 하고자 하는 바는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것이다. 따라서 범인을 잡는 과정이 영화를 진행시키지만 초점은 두 인물이 범인을 잡는 방법이 어떤 변화과정을 거쳐 두 인물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두 캐릭터의 부딪침, 이는 1980년대를 살았던 기존 세대로 대표되는 박두만과 이성과 논리로 과학수사를 하겠다는 새로운 가치관이 부딪치는 이야기이다.
영화 내내 서울지역과 대도시의 대학생들 데모로 경찰 인력을 동원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들이 등장한다. <빗속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전두환이 외국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동원된 여고생들의 인파와 대학생들의 데모장면이 교차 편집되고,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조용구가 데모진압대의 백골단으로 나가 여대생들을 짓밟는 모습이 스케치 된다. 이후 대학을 가지 못한 조용구는 박두만과의 대화에서 대학생들에 대한 왜곡된 소문과 이야기로 대학생들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게 된다. 이런 조용구도 어찌 보면 당대 우리 자화상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만 범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살해하거나 결박할 때도 모두 피해자가 착용했거나 사용하는 물품을 이용한다. 비오는 밤,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함정 수사를 벌이지만, 이를 비웃듯 다음날 아침 또 다른 여인의 끔찍한 사체가 발견된다.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다시 감추고 언론이 일선 형사들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형사들은 더욱 강박증에 빠지게 된다.
초조한 나머지 박두만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현장에 가서 고사도 지낸다. 그러면서 박두만은 또 다른 범인 대상자를 잡지만, 살인현장에서 살아남은 여인의 증언으로 이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를 통해 범인에 비해 경찰의 공권력이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두만은 80년대 형사들의 대표적 유형을 보여준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금전관계나 강도여부, 치정관계 등에 혐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다. 즉, 사명감과 지구력에 의존한 끊임없는 탐문 수사만 할 뿐이다.
이후 경찰서의 여순경 귀옥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방송되는 날만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하지만 범인을 잡으려도 수사에 동원될 경찰들이 당시의 데모진압에 투입되어 번번이 실패한다. 이를 통해 80년대 후반의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데, 당시 5공 후반부의 국가 공권력이 시위와 반정부세력 진압에 투입되어 민생 치안보다 정권유지에 더 골몰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범인이 살인을 저질러도 고스란히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에 빠진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살인현장에 세워지는 허수아비 제웅들이다.
박두만이 잡은 범인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살인은 또 저질러진다. 결국 박두만은 자신의 수사방법과 세계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서태윤에게 인정하게 되고 자신의 세계관에 내적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3장에서 <우울한 편지>를 보낸 박현규가 용의자로 잡히고 자신의 추리와 증거에 의해 서태윤은 그가 범인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박현규는 완강히 부인하면서 증거를 대라고 형사들을 조롱한다. 박현규를 취조하면서 서태윤은 자신의 확신에 빠져 예전의 박두만의 모습처럼 변해간다. 증거가 없어 박현규는 풀려나고, 두 형사는 백광호의 증언이 자신의 한일이 아니라 목격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유일한 목격자 백광호는 도망가다 기차에 치여 죽는다.
이제 미국으로부터 올 시체에 남아있던 유전자 정보만이 유일한 단서가 된다. 그 동안 박현규를 감시하던 서태윤도 서서히 이성을 잃어간다. 박현규가 사라졌던 두 시간 동안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자, 증거가 도착도 하기 전에 서태윤은 박현규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정확히 증거가 될 수 없다는 통보가 오게 된다. 하지만 서태윤은 이성을 잃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이로서 서태윤의 세계관이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 마치 당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혼란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영화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믿었던 사실들이 모두 사실인지 거짓인지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시대를 증언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박두만이 논두렁에 누워 영양주사를 맞는 장면이나, 조용구가 백광호에게 찔린 못 때문에 파상풍이 걸려 다리를 자르게 되는 등 이를 통해 피폐해져가는 형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빠지면서 형사들마저도 살인의 광기로 미쳐간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살인을 추억케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아직도 미결로 남아 공소시효가 지나고 있다. 살인을 추억하게 만든 80년대, 광주와 그 아픈 기억 속의 우리는 어떻게, 어떤 꼬라지로 살아왔는가?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영화는 80년대 실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는 화성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1980년대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제유적(提喩的)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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