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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심은 사람과 포도나무,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

바람분교장 2008. 8. 8. 14:26
 

 

 

 

   

나무심은 사람

                         

                                   한 승 태

 

 

문화 강대국 프랑스하면 내게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다. 고풍스런 건축물과 오르세이 미술관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이 있고, 세계의 유행이 숨 쉬는 대도시 파리가 아니다. 그곳은 프레드릭 백 감독의 애니메이션<나무 심은 사람>의 배경인 프로방스의 작은 산골마을이다.


프레드릭 백의 <나무 심은 사람>은 장 지오노의 <나무 심은 사람>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황무지를 거대한 숲으로 만든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양치기의 기적 같은 삶을 다룬다. 작은 산골 마을은 숯을 만드는 일로 황폐화되고 사람들은 떠나간다. 그러나 혼자 남은 양치기 노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황무지는 몇 십 년 뒤 숲으로 변하고 마른 우물엔 다시 물이 나오고 계곡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떠났던 사람들은 어느새 돌아와 숲의 풍요로움을 즐긴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공기와 물, 그리고 땅과 나무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가꾸는 한 인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프레드릭 백은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보여주며 전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라는 나무를 심어주었다. 이 작품을 본 많은 캐나다 사람들에 의해 나무심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총 2억 5천만 주의 나무가 심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의 환경보호운동이 더욱 촉진되었다고 한다.


나는 문화가 양치기 노인의 나무 심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심는다고 금방 자라주지 않는 것이 나무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나무를 심지 못한다. 나무의 그늘을 자신이 즐기려는 사람은 나무를 심지 못한다. 적어도 몇 십 년 후를 바라보며, 다음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나무는 자라는 것이다.

  

 

 

프랑스 안시의 정경으로 멀리 알프스의 눈 녹은 물이 만든 호수가 보인다 

 

애니메이션 축제가 매년 열리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안시는 자연환경이 우리 춘천하고 비슷하다. 알프스의 만년설은 녹아 자연호수가 되었고, 나무들은 우거져 아름드리 숲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 호수의 맑은 물과 숲을 지키기 위해 1956년 깐느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부분을 떼어내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50여 년 동안 진행하면서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축제로 성장시켰다.  

 

축제의 메인 행사장 봉리우 쎈터로 두개의 극장과 도서관이 있다


마켓이 열리는 팔레스 호텔의 참가부스 중에서

이곳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심사위원들은 2002년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에 이어 2004년 성백엽 감독의 <오세암>을 장편부문 대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붉은 돼지)를 비롯해 프레드릭 백(나무를 심은 사람), 빌 플림턴(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ㆍ뮤턴트 에일리언) 등의 스타 감독들을 선뵈었다. 이번 오세암의 수상은 ‘헤어 하이’(빌 플림턴), ‘P3K 피노키오 3000’(대니얼 로비쇼드), ‘엘시드’(조제 포조) 등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제치고 대상의 영예를 안았기에 더 의미가 크다.

 


축제 참가자와 기자 및 관계자들의 접수 현장

올해는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초청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해여서 장, 단편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이 특별전으로 상영되었다. 따라서 보다 풍성한 작품이 소개되어 우리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알렸다.

 


봉리우 센터 앞의 야외 행사장으로 공연 및 영화상영과 휴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들리는 말처럼 이런 특별전과 서울시장의 방문으로 해서 <오세암>이 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세암>은 경쟁부문에서 수상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세암>의 수상을 두고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직접 현장에서 경쟁 작품들을 살펴본 바로는 <오세암>은 충분히 수상 자격을 갖추었다. 아무리 우리가 로비를 하고 극성맞더라도 안시는 정책적으로 또는 배려의 마음으로 상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이 문화강국 프랑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오세암>의 수상은 우선 스토리가 탄탄하고, 동심을 세밀하게 잘 표현했기에 수상이 가능했다.


다른 작품들도 좋은 작품이었으나 <오세암>은 상을 받기에 손색이 없는 좋은 작품이었다. 같은 부문의 경쟁작이었던 조제 포조 감독의 <엘시드>는 캐릭터가 독특하고 대작이긴 했지만 이야기가 산만하고, 극적 긴장도 떨어졌다. 이는 그간 디즈니가 보여준 주제의 재탕이면서도 디즈니보다 이야기의 구성이 허술하였다. 첫 부분은 상당히 공을 들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서사를 밀고나가는 힘이 빠져버렸다.    

 


개별 부스에는 각 회사의 애니메이션이 소개된다. 개인들은 자신의 홍보물을 들고 직접 알리기도 한다.  

 

어쨌든 애니메이션은 기술도 중요하겠지만 문제는 스토리다. 스토리가 탄탄하면 기술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관객들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든다. 이런 사실은 근래 개봉된 몇몇 한국 애니메이션 작품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세계적으로 3D애니메이션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으나, 정작 작가들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내용이며, 그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할 도구로써 3D를 사용하였다고 인터뷰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3D는 표현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이번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시각이 휴머니즘 쪽으로 기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개막작으로 초청된 일본 콘 샤토시 감독의 <동경 대부>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다. 영화제에서 개막작은 상당히 중요한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제의 중요테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퍼펙트 블루>나 <천년여우> 등 극사실주의 영상과 독특한 심리묘사로 이름난 콘 샤토시 감독은 <동경대부>에서 이전의 작품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인공들은 동경의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노숙자들이다. 이야기는 이 노숙자들이 엉겁결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아기의 부모를 찾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우리 애니메이션은 이번 수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2002년에 이어 또 새로운 나무를 심은 셈이다. 이렇게 심은 나무가 잘 자라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아니 더 나아가 문화산업은 포도나무 아래 선 여우의 입장과 같다. 포도는 크고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당장 따먹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포도를 산업적 이익이라고 가정해보자. 물론 문화산업에 산업적 이익 외에 다른 것도 많지만 단순화시켜보자. 그럼 저 포도나무의 열매는 누가 먹을 것인가, 저 포도는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 


언론의 지적에 의하면 요즘 애니메이션 업계는 투자 환경 악화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가운데 소위 `대박`이 터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해 제작비 120여억 원을 들인 최고 화제작 <원더풀 데이즈>는 2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오세암>, <엘리시움> 등 다른 개봉작들도 10만 명을 넘기지 못하고 조기에 간판을 내려야했다. 많은 자본으로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이 흥행에 잇따라 실패함에 따라 투자 심리는 날로 위축되었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을 늘리는 등 산업육성에 앞장서고 있지만 업계에선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이 대규모 지원이 없어서일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일까? 그럼 디즈니처럼 대규모의 예산 지원만 가능하면 당장 디즈니처럼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차라리 빨리 포기하여야 옳을까?


그러나 문화 상품으로서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우선 세계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화적 저항감이 적은데다 시류를 잘 타지 않아 해외 수출에 실사영화보다 더 조건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애니메이션은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 영화, 캐릭터, 모바일 시장 등 연관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데다 실사 영화가 넘기 어려운 국제 장벽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우리가 우선적으로 투자할 만한 문화산업으로 꼽혀왔다. 정부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고, 많은 대학에서 우수한 애니메이션 인력을 배출시키고 있어, 한국이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가올 세기가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란 시대의 조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7~80년대 우리 애니메이션은 미국이나 일본의 하도급을 받는 주문생산방식(OEM) 국가로 알려져 왔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의 저질스러운 하위문화로 보는 일반 인식의 벽도 높았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관객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는 물론 그 동안 우리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인 기획의 부재로 인한 결과였다. 이제 우리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몇 나라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디지털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로 우리가 꼽히고 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의 활용이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획이다. 60년대 처음 창작의 불씨를 당긴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이후 몇 년간 창작 기획이 이루어지다 70년대 중반에 들어 외국 작품의 하청제작국으로 전락하며 스스로 창작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적은 양이지만 하나 둘 창작품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간의 OEM제작의 타성과 창작의 공백은 우리에게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따라서 우리 애니메이션이 근 50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 새로 시작해야하는 입장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니메이션이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나라이다. 그것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감과 인내심을 갖고 이 거대한 나무를 가꾸어야 할 때이다.


그 동안 애니메이션이 저급한 문화로 인식되었던 것도 새롭고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애니메이션이 삶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면서도 산업적 파급력이 큰 매체라는 것을 인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기획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여 마케팅을 해야 한다. 또한 어린이만의 장르가 아닌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장르로 다양해져야 한다. 애니메이션은 한국 실사영화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매년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문화의 산업적 중요성을 말하곤 한다. 또한 문화산업을 위하여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데 선뜩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산업에 문화는 실종되고 어느새 산업만 남아서 돈 벌기에 눈이 벌겋다. 이름만 빌려준 꼴인 문화는 매번 돈이 안 된다고 내팽개쳐진다. 그러면서 문화를 쉽게 포기한다. 부러운 눈으로 남의 문화만 힐끔거리며 일부는 표절로 돈벌이를 한다. 문화적 기본 바탕이 함께하지 않는 문화산업이란 모래성과 같다. 우리는 언제까지 포도나무 밑에서 겅중겅중 뛸 것인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도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짓고 큼지막한 청사진을 내걸지만 쉽게 지쳐버린다. 이는 산업의 기본이 되는 문화를 산업적으로만 판단하여 산업의 열매만을 먹으려하기 때문이다. 성급한 결과주의가 낳는 허무주의가 판을 친다. 문화시설을 하나 지어놓으면 금방 성과가 나와한다. 재정이 열악한 지방정부는 그 조급함이 더 심하다. 또한 자치단체장의 임기 동안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단체장에 의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 만큼 지방 정부는 자치단체장의 문화적 마인드가 도시문화자체를 좌지우지한다. 따라서 문화의 근간이 되는 시설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문화적 바탕을 지원하지 않고 돈벌이에만 목을 매단다. 그러나 문화는 산업이나 구호, 건물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큰돈이 들어올 것 같았던 이 문화괴물이 돈을 당장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지방단체와 지원 단체를 중심으로 모였던 중소업체들은 단체장의 마인드에 따라 헤쳐모여 식으로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돈다. 자치단체와 그들에게 문화산업은 신포도일뿐이다.

 

 애니메이션 기술의 역사 전시장(에밀레이노와 프락시노스코프 재현)

다시 미국의 디즈니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으로 돌아가자, 미국의 문화기반 시설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박물관과 도서관, 미술관 등 국가사업으로 진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개인적으로 하는 소규모 문화시설도 다양하고 많다. 물론 국가와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풍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결과물을 내놓는다. 숫자와 그래프로 말하진 않겠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 미국은 문화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런 문화풍토의 애니메이터들과 작가들은 그들이 누려야할 소스가 손만 벌리면 닿을 곳에 있다. 시설과 산업이 아닌 문화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산업이 되고 있다.


우리는 남의 나라 포도나무만 바라보며 언제까지 침을 삼킬 것인가. 결과만을, 달콤한 열매만을 바라며 언제까지나 포도나무 아래의 여우처럼 겅중거릴 것인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다 함께 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을 때다. 물론 나무는 당장 자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심는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 나무는 심어야 한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나무 심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 나무에 물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산업을 말하기 전에 문화를 말하라. 문화가 익으면 포도는 자연스레 떨어질 것이다.


 문화기반 시설로 이익을 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 나무를 심었다. 지금 당장이 아닌 몇 십 년 뒤에 싱그럽게 익을 포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 글은 2004년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다녀와서 모 신문사에서 청탁한 글로 썼으나, 너무 길어서 싣지 못한 글이다. 이때 성백엽 감독의 <오세암>이 장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