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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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5월 23일 / 박용하

바람분교장 2020. 5. 23. 11:33

5월 23일

 

박용하

 

 

그가 가고 난 자리에 뒤가 남았는데 그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죽임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못 견디게 한다.

 

그가 삶이었을 때 밥값 술값 내는 인생 선배나

어깨를 내주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동무쯤으로 생각했다.

강자한테 대들고 약자한테 함부로 안 하는 사람이어서 팬이 됐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세상에서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 얘기야 없는 게 아니지만

뒤 같은 거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그가 떠난 뒤를 더 돌아보게 된다.

 

 

내가 놀던 자리, 내가 머물던 자리는 어떠했던가.

 

앞으로 나서지 못해 뒤에서 숨죽인 날들의 기억 속에서

하염없이 뒤를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절벽을 붙잡는 심정으로 뒤를 잡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맨땅에 헤딩해 권력을 쥐었다.

그게 그의 첫 번째 죄였다.

그는 권력을 쥐고도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게 그의 두 번째 죄였다.

 

그런 그가 가고 없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런 그가 가고 난 뒤에 그가 더 강하게 남았다.

그가 가고 난 자리에 그의 자리가 남아 있다.

그게 그의 힘이다.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중에서  


5월 23일

 
그가 가고 난 자리에
뒤가 남았는데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죽임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욕되게 한다
그가 삶이었을 때
그를 정치인 이상으로 생각했다
 
털털하게 술값 내는 선배쯤으로
강자한테 덤비고 약자한테 함부로 안 하는 사내자식으로
어깨를 내주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동무쯤으로
 

그런 그가 가고 없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가 가고 난 뒤에 그가 남았다
 
그는 맨땅에 헤딩해 권력을 쥐었다
그의 첫 번째 죄였다
 
그는 권력을 쥐고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죄였다
 
사람은 뒤를 봐야 한다는데
뒤 같은 거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그가 떠난 뒤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가고 난 자리에 그의 자리가 남아 있다
그게 그의 힘이다

 

박용하 시집 <저녁의 마음가짐> 중에서

 

 

 

운명이다

 

한승태 

 

 

애막골 근처 오월의 논길을 걸으면 온통 개구리 울음이다 울음뿐인 골짜기를 지나면 은하수 가득 벼들의 눈물도 흐르고 눈물에 젖고 나면 별들은 일시에 무너져 내려 몸을 헤집고 살 부비는 종소리 깊게 퍼져나가고

 

누가 당신에게 울음을 옮겨놓았나 손바닥으로 별을 쓸어보는 밤이다 은하수엔 숭어 떼 뛰고 함부로 던진 훌치기바늘은 등허리를 헤집고 질끈 눈 감은 울음은 논바닥에 나뒹구는 밤이고 어차피 혼자인 밤이고 소쩍새 나는 밤인데

 

시집 <사소한 구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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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 시인과 나는 그날 그 시간에 북쪽의 바다를 보기 위해 내린천 산골짜기를 지나다 소식을 들었다. 맘이 편치 않고 조금 지나니 분노가 일었고, 조금 지나니 가슴 한 구석을 낚시 바늘이 채가듯 찢어졌다. 우리는 양양의 근처 포구에서 숭어낚시를 하는 꾼들을 보았다. 홀치기 낚시였다. 미끼없이 낚시바늘만으로 바다를 지나는 숭어의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그럼 숭어들은 느닷없이 등허리가 낚시에 꿰어 방파제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멘트 바닥에 나뒹구는 숭어 한 마리를 재빨리 발로 포구 쪽으로 밀어넣었지만 낚시에 혼이 팔린 꾼들은 더욱 빨리 낚시대를 바다를 향해 던졌다. 

우리는 얼얼한 입안으로 점심을 먹었던 것도 같고 북으로 북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휴전선 거진 다 가서 마지막 등대를 보고 우리는 밤새 울음을 마셨다. 분노를 마셨다. 11년이 지나서 그와 나는 겨우 시 하나씩을 기록한다. 나는 시를 오래 주물럭대다 개인사처럼 힘을 잃었고 그의 시는 다정했지만 묵직한 힘이 있었다.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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