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짝사랑 / 한승태 본문
짝사랑
풀벌레가 운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황금빛 나뭇잎이 노래한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거부하면서 너는 탄생한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라 만차의 기사 돈 키호테!
농부의 딸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듯
나도 그대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야 할까보다
기사도를 위해 그대는 공주가 되어야 하리
농부의 딸이던 귀부인이던 하다못해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어도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가능하리
그렇다고 그대가 나를 사랑할 필요는 없으리
세간살이가 필요한 세상의 산초 판사들아
목사, 이발사, 처녀들아
비웃고 비웃어라
나의 사랑은 저자거리나 책 속이나 들녘의 노동에는 없는 것
인과를 벗어나 편력의 길을 떠나는 맹인 무사
새롭고 이상한 힘으로 그대에게 헌신하거니
해피엔딩을 거부하는 길이 나의 소임일 뿐
그대의 사랑스러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네
알아도 모른 척 해야 하리
내 고독한 임무가 영원하기 위해
차라리 그대는 나의 얼굴을 몰라야 하리
풀벌레가 운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황금빛 나뭇잎이 노래한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거부하면서 너는 탄생한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계간 <시작>, 2017.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