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2013 유심 6월호에서 건진 시들 본문
적멸을 위하여
손진은
한적한 산길,
민들레와 소루쟁이 보리뱅이 배뱅이와 함께 서서
부위 가리지않고 먹어대는
한 떼를 본다
반쯤 입 벌린 채 발효를 시작하는 고라니의 샅
금맥인 양 파들어가는 저 떼
현기증 나는 꿈틀거림의 파도는
죽임 불어넣는 가장 숭고한 율동
때로 바람은 코에 향을 키질하고
햇살과 적당량의 습기는 달콤한 식욕을 불러들이는 소스
갈비살이며 등심
소줏잔과 트림, 헛소리를 알 리 없는 놈들은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깨작거리는 치들과는 다르지
열중한 육체는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 법
그들 슬고 간 어미의 윙윙거림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은 다만
무로부터 존재를 수백 수천으로 불리는
집중된 움직임만이 필요한 때!
저 고라니처럼
잘 살았다고 미소할 때
퉁퉁한 신생의 자식들이
안방인 듯 쳐들어와 입가에 달라붙어
물들고 터지고 빛나는 것이다
목련꽃도 잘못이다
윤제림
춘계 야구대회 1차전에서 탈락한 산골 중학교 선수들이 제 몸뚱이보다 커다란 가장을 메고 지고, 목련꽃 다 떨어져 누운 여관 마당을 나서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저마다 저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지 모두 고개를 꺾고 말이 없다. 간밤에 손톱을 깎은 일도 죄스럽고, 속옷을 갈아입은 것도 후회스러운 것이다.
여관집 개도 풀이 죽었고,
목련도 어젯밤에 꽃잎을 다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흔든다.
봄은 미신과 가깝다.
북항
서효인
곡물이 반출되는 창고였다. 우리는 보급창을 지키는 병사가 되어 항구의 끝 방파제에 모였다. 누구하나 도망하지 못하도록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어 몽깃돌에 고정했다.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을 해준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온다는 소식이오. 얼마나 거대하냐면, 거대함의 끝을 누구도 본 적이 없다고 하오. 거대함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거대하다고 하니 우리는 두려워하기로 결정했다. 항구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 위해 줄을 서고, 번호표를 뽑았다. 인도주의적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는 먼저 밧줄을 내밀었다. 묶인 상태에서 여잘ㄹ 주물럭거리는 치한도 있었지만, 항구도시에서 우리끼리 그런 것은 눈감아주자. 이제껏 우리 등에 올랐던 곡물이 모두 합하여 쏟아졌다. 이곳은 분명 남쪽인데, 항구의 이름은 왜 북항일까? 보급창을 지키지 못한 우리는 쓸쓸히 더러운 바닷물 속으로 퇴각한다.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을 해준다. 수고하셨소. 두려움의 일당은 사소하오. 얼마나 사소하냐면.....
<2013 유심 6월호>에서
이외에도 함민복의 <비빕밥>, 김언희의 <치즈를 먹는 일요일>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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