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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본문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 사족 --
나도 이십대에 이런 시를 써서 문예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아니다. 발표가 아닌, 응모를 하여 최종심에는 올랐지만 떨어진 기억이 있다. 제목은 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감은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봉급쟁이 삶이라는 것이 자신이 기거하는 방 한 칸과 한달치의 먹거리만 간신히 해결하는 정도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 형태도 바뀌고 있지만 바뀌지 않는 공포가 있다. 카프카의 공포가 그것이고, 월급쟁이들의 공포가 그것이다. 안현미의 시를 읽으니 이십대로부터 지나오면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바꿔가면 살아왔지만 내 삶이 여전히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도 말이다. 그것이 여상을 나온 한 여자의 삶이나 대학을 나온 삶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안심이기는 하다. 우린 공포로부터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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