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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길앞잡이 한 생각으로 이만큼 걸었으니덕분에 적적함 모르고 잘도 왔다마는너와 헤어지고 갈피 못 잡는이 어수선한 마음은 어찌할까나 민영시집 流砂를 바라보며> 창비, 1996 민영 1934~2025. 06.17195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1972년 첫 시집 이후 , , 엉겅퀴꽃, 1987>, 을 간행함1991년 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응원가 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이다대가리가 대가리끼리 모여서 싸운다. 대가리 대가리똥대가리대가리 대가리개대가리 개가리 터지게싸운다부처님 죽이고싸운다 소리 병든 말 한 마리가광야를 가고 있다. 사막의 모래알들이일제히 일어서며 소리쳤다. 해 돋는 쪽으로 가랴?아니, 해지는 쪽으로 가라해 지는 쪽으로 가라! 울음소리 어디선가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
내 책상 위에 있던 교실 내 책상 위에 국화가 있었다국화 위에 편지가 있었다편지 위에 국화가 놓였다국화 위에 국화가 쌓였다 줄 세워진 우리들 손에 들린 국화를 잊는 선생들이 들어온다 활자 가득한 칠판국화를 들고서 말이 없었다말을 못했다 오늘 당번 누구지선생은 말하고 당번은 죽었어요 말을 못했다국화를 들고서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린다 편지가 놓였다 내 책상 위에당번은 읽어라 선생은 말했다일지 못했다 당번이 죽었지슬픈 일이다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선생은 말한다 너는 교과서를 읽어라 종이 울릴 때까지 읽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애가 죽었어요 아무리 그래도어쩔 수없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흔들리는 등 위에 흰 손이 놓였다횐 손 위에 흰 손이 쌓였다흰 손이 계속되었다 송승언 시집 ..

몸이 품은 불, 불이 품은 상처_시인 박기동한승태(시인) 박기동 시인께서 어제(5월 25일)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한 동안 망연했다. 그는 강원도 시인들의 큰 형이었고 강릉과 춘천의 풍성한 문학을 위해 애써온 문학주의자이기 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품은 넓어서 강원의 산천은 물론 어중이 떠중이 모두를 품었더랬다. 그를 아는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알리라. 시인은 1953년 강릉 왕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필드하키선수를 하면서 시를 읽고 문학 동인을 결성하였다. 몸을 쓰는 것으로 업을 삼으려던 선수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1974년 대학시절 시문학에 시 가 당선되고, 1982년 심상에 외 2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85년 첫 시집 를 시작으로 내 몸이..
지렁이 전사_홍일표 어쩌다 살아남아온종일 굽혔다 폈다 온몸으로 우는 젖은 육신들미처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툭툭 부러져 바닥에 뒹군다 이어지지 못하고 마디마디 끊어져 있는 검붉은 호흡들태초부터 흘러온 몸의 언어들은 가면이 없다메타포 없이 온몸이 눈이고 손발이어서 최대한 바닥에 몸을 붙이고한 구절 한 구절 바닥을 일으켜 세우며 기는수식어를 버린 단문들 오후 내내 눈 밝은 햇살이 쪼그려 앉아 읽고 있다 2024년 겨울호 중에서 무명의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누군가 눈밝은 이가 자기의 시를 읽어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위 시는 메타포가 없다지만 시는 온통 메타포이다. 지렁이는 시 혹은 단문의 글이겠다. 그 시나 단문은 바닥을 얘기하며 젖어 있다. 그렇게에 바닥을 일으켜 세운다. 이 시의 절정은 마지막 연이다...
사이비 한명희 이렇게 절실한 말이 또 있을까 사이비 영어도 아니고일어도 아니고순우리말을 더욱 아닌 다시 생각해보면 영어같기도 하고일어같기도 하고우리말 같기도 한 사이비 가짜인 듯하다 진짜인 듯하고진짜인 것 같다가 가짜 같기도 한 진짜일까봐 떠날 수 없고가짜일까봐 더욱 떠날 수 없는 알면서도 속고몰라서도 속는 사이비 이 안에도 사이비가 있다우리들 중에 숨어 있는 사이비가 있다 내 안에도 있다아닌 척 앉아 있는 사이비가 있다 -미네르바 2024년 겨울호 중에서 때가 왔다. 대통령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정말인가? 진짜인가? 사이비인가? 왜 사람들은 속는가? 시인은 말한다. 그건 우리 안에, 아니 내 안의 사이비가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민주주의가..
언덕 언덕파란 눈썹과 같은 언덕 나는 언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무엇이든 그 언덕을 넘어서 왔거든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였으니까 그 한 사람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지그리하여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나는 그 언덕의 노래였으면 했지주인이 없거든 노래는 갇히지 않지그 언덕과 같지 노을 속에서멀리 사랑이 보이지 붉게 타는 노을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그 언덕을 넘어서 가지누구든 언덕을 넘어서 갔거든하늘 보며 작아지며 넘어갔거든나는 보이지 않지 그대로언덕이거나적막이거나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만나였으니까 장석남 시집 10p~11p중에서 언덕 너머를 꿈꾸는 사람은 낭만주의자다. 이 시는 언덕을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언덕에 머물러 있다. 너머..
나를 위한 기다림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나는 내 인생의 관람객3등석 C열에 앉아서 꿈과 인생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영화를 보노라면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도나의 근원을 알 수 없다약간 우울했지만 꾹 참으면서 영화관 앞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오래 기다린다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나는 희망을 내려놓고 기다린다언제 또 이렇게 이유없이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기다려볼 날이 있겠어버스가 도착하고 낯선 사람들이 내리고다시 버스에 올라 떠나가는 사람들나를 위한 이 막연한 기다림!나는 누구의 대역이던가 박세현 시집 중에서 1953년생,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상주작가로 있는 박세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다. 예술영화관 아트스페이스의 중독자이며 거리탐색자이며 빗소리듣기모임의 준회원이고 ..
북향 방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겨울까지 익혀왔다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약간의 광선에도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잿빛인 채 저물었는지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조금씩 사전을 읽는다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기억나지 않고돌아갈 마음도 없다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빛이 변하지 않는 한강, 계간지 ‘문학과사회’(147호, 2024년 가을)에서북쪽이기에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것이 있다. 이 시도 그렇다. 우리가 아는 북쪽은 무엇인가? 서로서로가 짐작하는 북쪽을 만져본다. (한승태)
숨을 껴안다 오늘은 흉곽이 아파내 숨을 내가 가만히 껴안고 있다가늘고 부드러운 숨을 골라흉곽으로 넣어 주고 있다 흉왠지 흉본 일이나들었던 일들이흉곽 속에는 웅크리고 들어 있을 것 같아보듬듯 타이르듯 안고 있다 내 숨을 껴안고 있다 보면숨이란 참 아픈 것들이었구나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삼각형이나 가시 모양 혹은깨진 사금파리 모양이겠구나 생각한다 남을 흉본 흉과내 귀에 닿지 않은 흉을어쩌면 들숨으로 불러들이는지도 모르겠다그리도 등이 아니라앞쪽이 아파서 다행이라며껴안아도 아픈비밀스러운 숨을 천천히 내쉰다 이서화 시집 파란, 2024 이젠 눈도 어둡고 몸도 말을 듣지 않고 얼굴은 사뭇 긁힌 흔적이 많아 둥글어졌겠다 싶은데, 사람들 눈에는 아직 모서리라 한다. 젊어서는 황지우 시처럼 재치 있는 시에 눈이 ..
윤동주 무덤 앞에서 정 호 승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어제는 조국을 위하여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어제는 조국을 위하여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오늘도 북간도 찬 바람곁에 서걱이다가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시인의 길이 이토록 무섭고 아득하다조국이 한 명 한 명 개인을 위해울어줄 날이 있을까?무엇을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