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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詩의 모더니즘 경향 연구 / 한승태 본문
백석 詩의 모더니즘 경향 연구
Written by 한승태
1. 들어가면서
우리의 근대문학에 있어, 아직도 활발한 연구가 되지 않는 문인들이 있다. 그 중에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 백석도 그렇다. 그의 시에 대한 언급이나 연구는 해방 이전과 1987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데-물론 그도 많지는 않지만-, 이는 그가 在北 시인이었다는데 큰 원인이 있겠다. 물론 1987년 이전에도 아주 간간히 문학사에 몇 줄씩 언급되고 있는데, 당대에는 간혹 모더니즘 시라는 평가와 전통적 서정을 다루는 시인으로 평가가 있었다.
1987년 이후 조금씩 그의 시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전통사회와 민속적 세계를 즐겨 그린 시인으로 더 많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시는 1935년 조선일보에 시 <定州城>를, [조광]에 <山地>외 7편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해방 후 1948년 10월 [학풍]에 발표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까지만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 북한에서 발표한 시와 동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우선 그는 1936년 선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시집<사슴>이 있다. 이 시집에는 그의 초기작 33편 시가 담겨있다. 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에서 김기림은 백석의 시가 주책없는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한 반면, 시골뜨기의 문학이라고 한 임화1)나, 시인 오장환은 풍경의 묘사와 조그만 환상을 코닥크에 올려놓은 스타일만 찾는 모더니스트2), 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당대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고,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현은 백석을 김영랑과 함께 식민지 치하 후기에서 일제의 문화적 탄압이 극도로 심해지고 있을 무렵, 외국의 서투른 모방보다 한국어의 재래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다듬는 것이 시인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 시인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원인을 시인의 내면의식의 성숙으로 보기보다는 상황의 압력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의 현실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는 윤동주 같은 저항의 길을 걷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 혹은 애잔함을 노래했으며, 그의 감정의 주된 기조음은 아스름한, 애잔함 등의 리리시즘3)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소재가 평북 방언이고 토속적이며, 무속적이어서 우리문화의 순결주의라거나, 샤머니즘적 속신俗信주의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소재적 측면에 치우친 평가로 보인다.
비록 시의 소재로 민속과 공동체 사회의 모습을 다루고 있지만 전통적 서정을 다루는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극도의 절제된 이미지와 고독한 근대인의 내면의식을 통해 전 시대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글은 당대의 모더니즘 시를 썼던 시인들과 어울리며 어떤 그룹을 형성하거나 시론을 통해 모더니즘 시를 쓰겠다고 밝힌 바는 없지만 백석의 시에 모더니즘적 경향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의 범위는 1948년 발표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까지의 시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2. 모더니즘 특성
먼저 용어상의 개념을 규정한다면, 근대성modernity은 역사적 ․ 철학적 개념이고, 근대화modernization는 사회 ․ 경제와 관련된 개념이며, 모더니즘modernism은 이에 대한 심미적 ․ 문화적 개념을 가리킨다.4) 로버트 B. 피핀에 의하면 근대성은 인간의 삶을 과거보다 한결 발전되고 개선된 것으로 파악한다.5) 모더니티는 본질적으로 서구 문명사의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근대성을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면, 발전의 원칙, 과학과 기술의 가능성, 이성 숭배, 그리고 자유의 관념 등 르네상스 이후 발흥한 부르주아 계층의 가치관이나 거의 다름없는 역사적 모더니티와 어떤 의미에서는 反부르주아지적 특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6) 심미적 모더니티라는 두 유형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미적 ․ 문화적 개념으로서의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근거한 예술적 관습에 대한 저항7)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미적 근대성의 한 범주로서 모더니즘은 미학적 혁신을 의미한다. 즉 부르주아적 근대성은 과학적 진보와 합리성에 힘입어 많은 분야에서 물질적, 제도적 근대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과학과 합리성이 낳은 폐단에 의해 사물화 되고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이고 반근대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이에 모더니즘은 이러한 병리현상이 만성화된 현실에서 그런 반근대성을 노출한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부르주아적인 예술적 관습에 저항한8) 예술 사조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개개가 따로따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수용과정과 발전과정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닌(하부구조의 토대로 인한 상부구조의 변화가 아닌) 외래적인 것이라도 우리 역사의 왜곡과정(일제에 의한 강제적 근대화)에 수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8)
어쨌든 미적 근대성은 다시 이 근대성의 경험을 반영하면서 반발하고, 수용하면서 저항한다. 모더니즘의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저항은 주로 미학적인 방법(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콜라주, 몽타주, 알레고리 등)인 점에서 정치적으로 반발하는 마르크시즘과 구별된다.9)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미적 근대성이란 근대 문학의 한 갈래인 모더니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우리에게 모더니즘이 서구처럼 사회적 반동에 의해 단계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 수입된 외래 사조였기에 모더니즘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사조와 혼융되어 나타났다. 모더니즘의 미학은 형식과 기법을 중시한다. 이는 기존의 형식들을 혁신하는 (전통의 거부라는 근대성의 원리) 방법 자체가 예술적 원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자본주의 모순의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을 배제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예술 관습의 혁신을 가져왔다. 이에 모더니스트들은 재현의 원리를 거부하는 대신 현실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자기 인식적으로 드러낸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처럼 ‘내용적’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식적 ‘형식’ 자체 속에 그 힘을 포함시키는 것이다.10) 또한 ‘몽타주11)’, ‘콜라주’ 등의 공간적 형식을 통해 동시성과 병치를 드러낸다. 이외에도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 등의 기법이 사용된다.13)
모더니즘modernism, 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지만, 이승훈에 의하면 우리시의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이미지즘,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을 지시하는 포괄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승훈은 <한국 모더니즘시사>에서 모더니즘을 단절개념으로 설명하는데, 흔히 모더니즘의 중심 개념인 미적 자의식, 자율성, 비재현주의 등이 모두 단절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미적 자의식이나 자율성이란 인생과 예술이 단절된다는 이른바 미적 단절 개념에 속하고, 비재현주의, 곧 반리얼리즘 역시 형이상학적 단절을 계기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모더니즘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미적 비판이라는 주장 역시 단절의 비판성, 말하자면 단절이 환기하는 부정성을 계기로 사회에 대한 상대적 비판성을 띤다고 해석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백석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3. 백석 시의 모더니즘 경향
그의 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평북 정주 지방 사람들의 삶의 체취가 들어 있는 시이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으며,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담아내는 시의 형식이 매우 개성적이다. 이런 형식을 통해 백석의 산문시와,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는 화자가 보이지 않는 시 등은 실험성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가 소재 면에서 토속적인 전통세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백석의 시에는 전 시대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갖가지 습속들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치성을 드리는 것부터 백중날 호미를 씻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백석이 시를 썼던 1930년대 당시에서조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오늘날 매우 낯선 것이 되어버린 것들을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소재들은 공동체 사회가 몰락해가고 강제된 근대화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기여한다. 이를 통해 한 시인이 겪었던 단절과 근대인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를 우리는 그의 시에서 들을 수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전통사회의 습속과 민속들은 일본의 강제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의 시에 애잔함이 묻어있다고 평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생각된다.
백석은 일본 유학을 통해, 영미 이미지즘을 접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또한 그의 시 중, 초기작인 <사슴>에 등장하는 시들은 이런 이미지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석이 활동하던 1930년대에 서구적인 것을 동경하고, 그것들을 시인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서구 문명세계를 그려 넣고자 한들, 얼마나 우리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서구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인가.14) 하지만 정지용, 김영랑, 김광균, 이용악 등의 작품에서 보면 당대에는 이미지즘적인 요소를 모더니즘 계통의 시로 인정되었던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지즘 시인들이 보여 준 독보적인 경지는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크지만, 이들은 도시와 신문명의 묘사 측면에만 치우쳐 내용의 깊이를 보여 주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디서 말 있는 듯이 커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하늘빛 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시집 [사슴]중에서 정주성 全文
정주城, 그곳은 백석의 문학적 세계를 자극하던 최초의 근원지였고, 그의 작품에 여러모로 디딤돌이 된다. 이 시는 백석이 1935년 8월31일 조선일보를 통해서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면서 그의 고향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시인의 첫 작품이지만 이미지를 통한 시적 감수성이 매우 반짝인다. 이제는 한갓 유물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 무너진 성터와 헐리다 남은 문이 있는 산 중턱의 원두막은 사람이 없는지 불빛이 외롭다. 아주까리기름의 쪼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적한 밤이다. 불빛과 기름 타는 소리의 시각, 청각 이미지와 허물어진 성터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반딧불이 어울려 고독감을 자아낸다. 강제된 근대화로 허물어지고, 소외되어 곧 사라질 위기에 있는 前시대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당대의 현실인식을 통해 상징성을 획득하고 있다.
1연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제시한다. 2연의 세계는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강화하는데, 일제의 침탈과 그로인한 강제적인 근대화가 몰아온 조국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따라서 단순히 고적하고 쓸쓸함이라기보다 강한 의미적 이미지가 생성된다. 더 이상 공동체의 삶이 지속되지 못하는, 더 이상 그러한 세계가 지켜지지 못할 것이란 단절감, 성문이란 것은 적으로부터 공격을 막는 것일 텐데, 이미 그것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그 세계는 여기저기 떠도는 파란 혼들이 유령처럼 날고 시적화자와 같은, 산새는 어두운 골짜기를 난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공동체적 삶의 세계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3연에서는 허무어진 성문 자리의 하늘이 저리도 쓸쓸하고, 마지막 행의 ‘또’는 조국이 무너져도 비루한 삶은 계속 될 것이란 쓸쓸한 전망으로 읽힌다.
마지막 연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등장하는데, 이 노인은 청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공동체의 삶이 깨어진 모습까지도 떠오른다. 따라서 단순한 이미지만 떠오르는 것이 아닌 당대의 삶의 모습이 상징성을 획득하여 시를 더욱 의미 깊게 한다. 이렇게 당대 현실을 자기 인식적으로 드러난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도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쨈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니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사슴>중에서 모닥불 全文
이 시를 보면 백석의 시가 꿈꾸는 세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알 수 있다. 이동순의 평에 따르면 그것은 (1)균등과 원형보존의 정신을 대전제로 해서 생존과 죽음의 구별을 허물어뜨리는 세계 (2)모든 살아 있는 것들끼리 더욱 하나가 되게 하는 세계 (3)계층 간에 구별을 허물어뜨리는 세계 (4)주체와 객체 간의 구별을 허물어뜨리는 세계 (5)식물질을 위주로 하되, 동물질의 폭력성까지도 식물질에 흡수시키는 세계 (6)사소한 사물에 대한 깊은 애착에서 보여주는 세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가 바로 <모닥불>이다.15)
이 시는 통시적인 것을 공시화하여 보여주는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개체적 사물들이 혈연관계로 결합된 가족의 집합체, 즉 하나의 가족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서의 ‘모닥불’은 삶의 훈기를 촉발시키는 기폭제일 뿐 아니라, 모닥불의 주변은 모두가 함께 그 훈기를 나누어가지는 공존공생의 장소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에는 제각기 특수조사 ‘-도’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이 사물들이 모닥불 앞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하고 평등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또 사물들이 개별적으로 열거되는 1연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 없이 모닥불의 질료가 된다. 이것들은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전시대의 유물들이다. 가장 하잘것없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2연에는 이러한 모닥불의 따뜻함을 나누어가지는 분배대상이 나열된다. 주체와 객체, 계층과 계층 간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 개별적인 것들이 모여 공간화하며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평등사상의 암시로 보인다. 백석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빈농이거나, 소외계층들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심미적 자율성과 자기 목적성을 근간으로 하는 모더니즘 작품들의 인물들은 전통적인 작중인물처럼 영웅이 아닌 반사회적 인물이나 낙오자이다.16) 근대화의 낙오자들은 농촌의 빈농계층과 도시의 소외 계층이며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해 옛 풍속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기존의 선비적이고 지사적이며 지적인 인텔리의 모습에서는 벗어나 있다. 백석의 시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소외계층과 지난 시대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따라서 2연의 세계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끼리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의 따뜻함을 함께 분배받으며 그것으로 위안 받는 세계이다.
이어서 3연은 역사의 비극성과 그 내력에 대한 환유이다.17) 너와 나의 현재의 역사성이 조상들의 역사로 확대되고 또 거꾸로 수렴된다. 조상들의 비극적 삶을 떠올리면서 식민지적 조건과 결부된 현재의 비극적 삶이 조상의 그것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 시에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어미아비 없는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되어서도 할아버지의 세대들은 살아왔고, 지금도 비록 불구상태이긴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다는 튼튼한 생명력에 대한 암시18)이며 전망이다. 따라서 이 시는 백석의 대표작으로 모닥불의 이러한 생명 사상을 통하여 식민지 체제의 불법성과 강압적 문화혼열정책의 폭력성에 맞설 분명한 근거를 스스로 마련한다.
백석의 시 형식은 이전 세대에 비해 새롭다. 그의 시들은 마지막 발표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제외하고 구두점이나, 쉼표, 마침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산문시 형식, 내적 운율의 획득 등으로 백석의 시가 당대에도 실험적이라는 평(박귀송)을 받았다.
이는 현실이 총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은 낡은 형식의 파괴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 자체가 모더니즘의 예술 원리를 구성한다. 의식 속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과 느낌 또는 기억 등이 주마등처럼 무질서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짐으로 마침표, 쉼표, 구두점을 무시하고, 긴 문장으로 이어가는 등 형식의 파괴가 나타난다. 이는 의식의 복합성, 시간의 유동성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19)으로 보인다. 이는 아폴리네르가 전통적인 율격과 형식에 반발하여 시도한 뒤 모더니즘 시인들을 중심으로 서구시의 형식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평북 정주의 동향 출신의 유명한 시인 김소월과 백석의 시취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소월이 민담이나 전설, 설화를 이용하여 민족적 정한의 세계를 민요조의 율격으로 직조하여 내었다면, 백석은 같은 소재를 사용하였어도 전통적인 율격과 형식을 배제한 채 시각적 이미지와 내면적 심상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김소월은 우리시의 전통 미학을 계승한 민족적인 시인이지만 예컨대 비를 대상으로 하는 <왕십리,1923>만 하더라도 대상과 시적 화자 사이에 거리가 유지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김소월의 경우에는 대상과 자아 혹은 화자가 하나로 용해되거나 대상에 대한 주관적 정서나 관념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로 용해된다. 이런 현상은 모든 전통적 서정시가 보여주는 미적 특성이다. 그런가하면 리듬 역시 전통적 리듬을 계승한다. 곧 사물의 사물성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사물에 대한 시인의 정서를 설명하는데 기여한다. 그런 점에서 김소월은 전통적 소재와 운율법을 따르며, 시 자체의 자유로운 리듬보다는 전통적 율격에 의존하고 있다. 그가 우리시의 전통성을 계승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20)
백석의 경우 시어는 평북 지방의 일상어가 사용된다. 백석은 김소월처럼 토속어(방언)를 사용했지만, 생활 속의 일상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보여준다. 당시 잡지의 편집자였으므로 누구보다 표준어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터인데, 일부로 지방어(방언)를 사용하여 시를 썼다는 점은 詩作 자체를 의식적으로 썼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는 또한 중앙집권화와 표준화에 대한 시인의 저항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시의 구어적 방언(토속어) 사용이 바로 표준어에 대한 강한 저항 때문이라는 김재용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모든 언어가 표준화되기를 요구받게 되는 데 거기에는 바로 근대의 중앙집권화가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21) 서울의 특정계층의 언어만을 기준으로 하고, 그 외의 지역과 계층의 언어를 변두리화 시키는 이 표준어의 권력으로 인하여 구체적 삶의 세계가 상실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언어의 몸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 삶의 현실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는 것은 추상적 보편성의 세계뿐이다. 그런 점에서 평북 지방어의 사용은 일차적으로 표준어에 대한 저항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근대의 중앙집권화와 물신화에 대항하여 인간의 진정한 삶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에 맞닿아 있다. 이것을 의식적으로 실천한 시인이 바로 백석인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계의 동인인 구인회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동인지인 <시와 소설>에 그의 시가 초대되어 <湯藥>, <伊豆國湊街道>가 실린 것도 의미 있다. 구인회는 당시 모더니즘적인 문학성을 추구하였다. 당시 이상이 <시와 소설>을 직접 편집했는데, 왜 하필이면 백석의 시를 실었을까? 이는 구인회 동인들이 백석을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시는 산문시 형태로 쓰인 것이 많은데, 그러면서도 내적인 리듬을 획득하는 것은 전통적인 율격이 아닌, 조사의 반복사용이라든지 열거적 방법을 통해 시적 율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모닥불> 중에서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려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 울안으로 가면 뒤 울안에는 고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중에서
<모닥불>에서는 열거되는 각 어휘마다 끝에 토씨인 ‘도’를 붙여 반복되는 중간운으로 인하여 리듬이 생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는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내용의 연쇄파장이 묘한 율적 감각을 준다. 연상 작용을 통한 이야기와 리듬의 재미 및 공시화를 보여준다. 연속된 내용의 열거는 백석 시인이 일구어낸 시어의 확장이기도 하지만, 형태적인 특징으로 볼 때는 산문적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 내재적 리듬을 느끼게 하는 특성을 갖게 한다.22) 당시 소월의 시에 비해 그의 시가 낯설게 보인 까닭이기도 하다. 민담이나 전설, 설화를 다루는데, 이 같은 차이는 그가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형상화했는지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백석의 시는 이야기의 수용과 그것에 걸맞는 문체를 가지고 있었다. ‘시골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은 결코 단순한 시도가 아니다. 그 어법은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가장 짙게 풍기고 있다. 이러한 어법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식민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길항해갈 수 있는 독자적 방안이 되었고, 이러한 의도된 시 창작적 방법으로 모더니티를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공동체 삶의 근원을 재확인한 것이자, 말살되어 가던 모국어에 대한 문학적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번역하여 발표한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소개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애란(아일랜드)어에 의한 애란문학은 애란의 봉건 씨족사회의 몰락과 같이 사멸하고 말았으니 그때란 바로 애란의 상류계급이 영국식민들과 제휴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리하여 애란어를 말하는 애란은 오직 애란의 극서지방에만 보존되었었다. 애란 농부들의 말 가운데 나오는 모든 영어의 정신과는 빙탄氷炭의 관계에 있는 것들을 극력 강조하고 또 이런 것들을 논리적인 조화된 체계 속으로 집어넣어서, 그는 그 독자의 문학적 방언을 창조하였다.
조이스는 외부의 세계를 사실寫實하는 데 놀라울 만치 ‘리얼’한 힘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그 힘을 주는 것은 곧 이 정확성이다.23)
4. 백석의 이미지즘 시
백석의 시가 보여주는 새로움은 이른바 객관적 감각성, 말하자면 주관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묘사하여 객관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도 있다.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창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디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드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툭박한 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夕陽>全文 1938. 4 삼천리문학 2호
<석양>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분히 현장적 생동감을 중시하면서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을 다채롭고도 능란하게 구사한다.
차마 끝에 明太를 말린다 明太는 꽁꽁 얼었다 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멧새소리> 중에서 1938.10 야성 3권 10호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같은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너머 平安道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白 樺>全文 1938. 3.조광4권3호
산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란 하늘에 떨어진 것 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산 밑까지 들린다 巡禮 중이 山 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절에 齊가 들었다 <秋日山朝> 중에서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靑枾>全文 山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산비>全文 山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진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東風이 설렌다 <쓸쓸한 길> 중에서
여승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 내음새가 난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 의 어늬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女僧> 중에서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 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사하다 흙은 젖이 커서 살같이 깨서 아지랑이 낀 속이 안타까운가보다 뒤 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 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다보다 울밖 늙은 들매띵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흰구름 따러가며 딱장벌레 잡다가 연두빛 잎새가 좋아 올라왔나보다 밭머리에도 복사꼴 피였다 새악시도 피었다 복사꽃도 새악시다 ....(이하생략) <黃日>일부 푸른 바닷가의 하이얀 길이다 아이들은 늘늘히 청대나무말을 몰고 대모잠풍한 늙은이 또요 한 마리를 드리우고 갔다
이 길이다 얼마 가서 甘露같은 물이 솟는 마을 하이얀 회담벽에 옛적본의 장반시게를 걸어놓은 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같은 외딸의 혼사말이 아즈랑이같이 낀 곳은 < 南 鄕>全文 캄캄한 비 속에 새빨간 달이 뜨고 하이얀 꽃이 퓌고 먼바루 개가 짖는 밤은 어데서 물의 내음새가 나는 밤이다(이하 생략) <夜雨小懷>일부
녯城의 둘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밥도 이러한 밤이었다 <흰 밤>全文
<이미지스트 시인들, 1916> 서문에서 로웰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미지스트들은 진부한 전통적 소재와 운율법을 버리고, 어떤 제재나 마음대로 선택하며, 시 자체의 내재적인 리듬을 자유롭게 창조하고, 일상 언어로 표현하며, 견고하고 분명하고 응축된 이미지를 제시할 것을 목표로 한다.24) 는 점에서 이 시들이 획득한 이미지는 아주 선명한다.
위의 시들의 공통점은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시의 감각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시들에서는 색채 감각어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 대상의 이미지에 색채를 부여함으로써 더 선명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또는 직접적인 색채를 제시하는 것보다 색채를 연상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시인이 의도한 바를 훨씬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그가 그리는 세계를 애정을 가지고, 그렇지만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다만 상기시킨다.
이들 시에는 이미지즘 시에서 중요시 여기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 태도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 사물들의 현장에는 진솔한 삶의 목소리를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들이 더 빼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런 시들이 창비 백석시전집의 3부에 나오는 [북방에서]의 시들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해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다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가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믈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全文 1948.10 학풍 창간호
유종호는 이 시에 대해 ‘무력한 인간의 의지를 깨닫고 운명의 힘에 항복한 그는 비애와 영탄을 여과하여 체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암벽에 외로이 서서 눈을 맞고 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살기를 다짐25)’한다고 평한다.
하지만 박혜숙은 한 개인의 슬픔이 그 시대의 아픔을 대리하는 비극성으로 공명처럼 울려오며, 이 시에서 갈매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시련의 운명관을 초극하는 의지이며, 여기에서 한국인이 강인한 정신으로 꾸려온 공동체적 삶의 철학을 감지할 수 있다고26) 평한다.
또한 백석전집을 엮은 김재용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물신화되어 가고 있는 삶의 현실에서 공동체적 유대와 우주적 교감의 결여 속에서 고독과 허무감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일 자체가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고독감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공동체적 유대도 깨어져 없어지고 우주적 합일의 경험도 가지지 못한 파편화되고 왜소해진 근대인이 겪어야 하는 고독 및 허무감과 이에 시달리면서도 주저앉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절절하게 읊은 작품이다.27)
이런 고독감과 허무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시인은 겨울눈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서 있는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강제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삶이 충만했던 전통적 삶과 단절되고 뿌리 없이 허공 속에 뜬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백석 시에 드러나는 고향 상실은 근대인이라면 모두 겪게 되는 존재론적 고향상실이다. 우리시에서 만나게 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백석의 시에는 우리가 종래의 우리의 시가 거의 다루지 않고 있거나 설령 다루고자 해도 경험의 제약과 자료의 궁핍 때문에 의욕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방언학, 민속학, 조리학, 식물학, 생태학 쪽의 놀라운 자료들과, 풍부한 북방정서를 보여준다. 우리는 백석의 시를 통해서 잃어버린 고토와 튼튼한 민족주체의 정신세계에 간접적으로나마 도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28) 또 이를 통해 우리 시의 지리적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석 시에 대한 논의는 그의 고향 정주를 중심으로 펼쳐진 토속적 세계인 초기 시에 집중되어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곬族 全文 조광, 1935.12
백석은 우리 민족의 적나라한 삶을 표현하는 데 민속적 소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샤머니즘적인 세계, 토속적 세계의 서사구조를 쉼 없이 언어들로 쏟아낸다. 이런 공동체적 삶의 원형질은 이 시인의 미적 감각에 의해 새로운 형식의 모던한 방식을 찾는다.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는 화자가 없는 위의 시는 ‘엄매 아베 따라’ 간 큰 집에서 경험하던 명절 때의 분위기지만, 내가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하는 말들이 아니다. 백석의 시는 시적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 나와 동일화된 화자의 정체가 감추어지고 대신 객관적 눈으로만 이야기한다. 이러한 방법은 극단적인 이미지즘과 같은 모더니즘 시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5. 맺는말 백석의 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평북 정주 지방 사람들의 삶의 체취가 들어 있는 시이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으며,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담아내는 시의 형식이 매우 개성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가 소재 면에서 토속적인 전통세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또한 전통사회의 소재들은 공동체 사회가 몰락해가고 강제된 근대화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기여한다. 이것들은 일본의 강제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과거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전통적 삶이 단절된 근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의 관찰이 더 큰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한 시인이 겪었던 단절과 근대인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를 우리는 그의 시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낡은 형식의 파괴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 자체가 모더니즘의 예술 원리를 구성한다. 그런 면에서 백석의 시 형식은 이전 세대에 비해 새롭다. 그의 시들은 마지막 발표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제외하고 구두점이나, 쉼표, 마침표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현실이 총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의식 속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과 느낌 또는 기억 등이 주마등처럼 무질서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짐으로 마침표, 쉼표, 구두점을 무시하고, 긴 문장으로 이어가는 등 형식의 파괴가 나타난다. 이는 의식의 복합성, 시간의 유동성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29)으로 보인다.
또한 백석의 시가 보여주는 새로움은 이른바 객관적 감각성, 말하자면 주관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묘사하여 객관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도 있다. 그리고 그는 내적 운율을 획득한 산문시 형식으로 시를 썼다. 그의 산문시는 이야기의 수용과 그것에 걸맞는 문체를 가지고 있었다. ‘시골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은 결코 단순한 시도가 아니다. 이러한 어법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식민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길항해갈 수 있는 독자적 방안이 되었고, 이러한 의도된 시 창작적 방법으로 모더니티를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도서 김재용,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이동순 편, 백석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7.
논저 박혜숙, 백석, 건대출판부, 1995. 유종호, 비순수의 선언, 신구문화사, 1963. 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 문예출판사,1995.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김윤식 ·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두산동아세계대백과 나병철, 근대성과 근대문학, 문예출판사, 1995. M. 칼리니스쿠, 이영욱 외 역,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4.
김성기 外,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97. 장석주, 20세기의 문학모험, 시공사, 2001.
문예지 월간 『현대시』, 1990. 5.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1) 임화, <문학상의 지방주의 문제>,[조광],1936.10,pp.65~67. “요컨대 현대화된 향토적 목가가 아닐까? [사슴]의 작가가 시어 상에서 일반화 되지 않은 특수한 방언을 선택한 것은 결코 작가 개인의 고의나 또 단순한 취미도 아니다. 나는 이 야릇한 방언을 시집[사슴]의 예술 가치를 의심할 것도 없이 저하시킨 것이라 믿으며 내용으로서도 이 시들은 보편성을 가진 전 조선적인 문학과 원거리에 잇는 것이다.”
2) 오장환,<백석론>,[풍림]통권5호,1937.
3) 리리시즘lyricism : 서정적 기분이나 수법을 추구하는 서정정신을 뜻한다. 그리스어의 lyra[수금(竪琴)]에서 나온 lyric(서정시)에서 유래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개성적인 정서를 표현, 혹은 추구하는 정신 ·문체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유명사, 시간 ·공간의 한정, 사상 등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내면적 ·연소적인 자기 체험의 직접 표현인 시에서 먼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용솟음치는 인간적인 기쁨 ·고뇌 ·분노 ·평온 등의 심정고백이고 자아의 투영이므로 리드미컬한 음악성을 수반하며, 동기는 자연적으로 생과 사 ·사랑 ·자연 등이 많다. 또한 풍경묘사에 있어서도 객관적 설명보다는 심상풍경(心象風景)으로서의 상징성이 강해진다. 이와 같은 성격은 낭만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의 작품에서 현저하지만, 시에 한하지 않으며 다른 장르의 작품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4)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p.27.
5) 같은 책, pp.26-27.
6) M. 칼리니스쿠, 이영욱 외 역,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4, pp.53-54 참고.
7) 나병철, 《근대성과 근대문학》, 문예출판사, 1995, p.149.
8) 같은 책, p.150.
8) 이승훈, 한국모더니즘시사, 문예출판사, 1995.
9) 같은 책, p.43.
10) 같은 책, p.186.
12)
11) 몽타주는 시간적 연속성(통시성)을 공시화(공간화)12)하는 기법이다.
통시성 diachronicity / 통시적 diachronic
이 말들은 <공시성 / 공시적>이라는 말과 대립되는 말이다. 통시성은 어원적으로 두 시점two times를 뜻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을 반드시 두 시점을 뜻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양과 음>은 <양>, <음> 두 요소를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공시적이지만, 이 두 요소들이 시간을 따라 어떤 사건으로 전개되는 것은 통시적이다. 가령 해가 지면 어둠이 오고 어둠이 끝나면 다시 해가 떠올라 밝음이 오는 등 양 음이 교차하며 이어지는 것은 통시적 사건이다. <희로애락>은 공시적이지만, 한 사람의 생애에서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은 다른 정황 다른 시간에 통시적으로 나타난다. 소쉬르는 공시성을 수평적 관계로 통시성을 수직적 관계로 본다.
공시성 synchronicity, 공시적 synchronic
이 또한 소쉬르의 용어들인데 <통시성>, <통시적>이라는 말과 대립되는 말이다. 공시성은 어원학적으로 동시성 Same time을 뜻한다. 소쉬르는 공시성을 논리적 또는 심리적 관계들이 어떤 하나의 체계(예를 들면 연설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텍스트 같은 것) 속에 공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가령 <양과 음>, <양지와 음지>, <좋은 날과 궂은 날> 같은 표현에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은 동시성을 띠고 공존하고 있다. 뜻을 넓히면 공시성은 무시간성timelessness이 된다. <양과 음>은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둠이 반드시 있음을 뜻하는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옳은 하나의 진리이다. 공시성에는 아이러니irony가 배태되어 있다.
조너선 컬러, 이종인 역, <소쉬르>,시공사,1998.
13) 나병철, 《근대성과 근대문학》, 문예출판사, 1995. p, p.187.
14) 박혜숙, 백석, 건국대출판부,1995, p17.
15) 이동순 편, 백석시전집, 창작과비평사,1987. 참조
이 부분에서 이동순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 개념을 말하고 있으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합일보다 ‘세계’라고 고쳐보았다.
16) 김욱동, op. cit., pp.82-87 참고.
17) 이런 부분은 야콥슨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고찰 입장에서 보면 분명해질 것 같다.
18) 이동순 편, 같은 책. 참조
19)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현암사, 1992. pp.74-103. 요약
20) 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문예출판사,1995. p20.
21) 김재용,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p524.
22) 박혜숙, 백석, 건대출판부,1995.p56.
23) 이동순 편, 백석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7. 참조
24) 같은 책 p18~p19.
25) 유종호, 비순수의 선언, 신구문화사, 1963.106p 재인용.
26) 박혜숙, 백석, 건대출판부, 1995.
27) 김재용,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518p
28) 같은 책, 174p
29)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현암사, 1992. pp.74-103.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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