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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시를 쓰는 시인들

강원도 시인 굽이굽이

바람분교장 2021. 11. 2. 09:23

들판의 트레일러 / 김개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펴지고 잘라지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하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망쳐버리기 일쑤니까


나는 매일 저녁 심장을 갈가리 찢는 노을을 구경하고
밤이면 부엉이 눈 밑에서 당신을 소재로 시를 쓸 거야


어느 날 혼자 보는 별이 더 아름답다 생각되면
내 부츠를 풀밭에 던져


돌이 별이 될 만큼 멀리 떠나가 줄게


- <시인동네>, 2020 2월호- / 시집에도 상재

 

 

 

소망이 담긴 이 시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시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좋다. 소박하지만 인간의 심장을 잘 보존하고 있다. 좋은 시는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시를 쓰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 어떤 사랑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을 망친다. 관계 속에 예속되고 그것으로 불행해지기도 한다. 다만 저만큼 떨어져서 보야 아름답다. 망가져서 들판에 녹슬어 가는 트레일러는 어째서 아름다움을 생산하는가? 돌과 별도 나와 아스라해서 아름답다. _한승태

 


일신상의 비밀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점 위로

사무실 천장을 뚫고 옥상 위로

저 아래에서 날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

하지만 난

맷돌에 눌려 죽은 아기처럼

자꾸 겨드랑이가 가렵다

 

 

 

 

전윤호 산문집_<나에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압권이다. 이 시대 직장인의 소망이나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다. 한 번만 읽으며 뭔 얘기인지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는 시다. 쉽다고 그 내용이 별 거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의 고통과 삶을 이토록 선명하고 쉽게 상징화하다니. 날개는 아마도 사표나 하고 싶은 일일 터인데, 사표를 던진다고 자유롭지 않거니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도 쉽지만 않다는 게 체제의 견고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꾼다. 질투가 나는 시다. 이 시대의 아기장수들이여 그래도 날개를 펴 보자. 한승태(시인)

 

 


중학교 선생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고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테 고발당했다

 

자지는 성기로 고쳐 부르겠다

젖 같은 얘긴 하지 않겠지만 만약 하게 될 일이 있다면

사람이나 포유동물에게서 분비되는,

새끼의 먹이가 되는 뿌연 빛깔의 액체로 고쳐 말하겠다

그리고 애들 문제는 경찰에 직접 맡기겠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수목한계선이 있는 학교여

 

 

 

권혁소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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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금기 설정하는 학교를 보여준다. 아니 선생을 반성한다. 가르침을 반성한다. 학교는 나무를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하는 한계 짓는 거와 같다. 원래 선생은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사회가 요구하는 금기를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다. 선생이 아닌 학부모가, 동료 교사가, 제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 여기서 간섭은 금기와 같은 말로 보인다. 상상력 풍부한 중학생들에게 상상력을 들쑤시면 안 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금기만 주입하면 될까? 교육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난장이가 된 인간을 니체는 슬퍼하였다. 나도 하늘이 멀어 슬픈 날이다. (한승태)

 

 


심퉁이

 

 

 

우리 동네 바다에는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만사가 심퉁이라 무리를 짓지 못하고

저 홀로 심퉁한 입술을 바위에 대고 산다

 

내 마음의 바닷가에도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세상과의 불화가 끝이 없어

심퉁한 입술을 돌덩이에다 붙이고 하루해를 보낸다

 

하루에도 열두 번

심퉁한 입술로 돌덩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홍섭 시집 <검은 돌을 삼키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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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집에는 선승의 결기가 드러난다. 시에는 마지막에 이르러 한칼이 그어져있다. 그를 칼잡이라 하면 혼날 거 같고, 선사라 하면 도리질 칠 터인데, 그의 말대로 좋은 음악과 좋은 향기를 쫓는 건달바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도 어느 폐사지를 거니는 건달바와 같다. 허허로운 연애와 황량한 석양 아래, 사연을 짐작하며 밝아보는 초석, 무너진 기와장과 돌탑 옆에 무심코 핀 애기똥풀, 무심한 듯 그는 진하다. 잿더미가 내려앉은 자리, 돌아가야 할 곳을 잃은 그의 긴긴 그림자를 가늠한다. 수호해야할 불법이 무너진 세상에서의 건달바는 그 수단을 달리한다. 그게 시일 것이다.

그의 시는 가뭇없는 바다의 이내 같다. 폐사지를 떠도는 범종 같은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조곤조곤 조인다. 그는 선문과 속문 사이에 가랑잎 타고 미끄러지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건달도 울화는 있을 터. 마지막 결구는 시조의 종장이나 한시의 결구, 하이쿠나 선사들의 공안을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사고 시인이고 칼잡이다. 한칼을 날리기 위해서는 조곤조곤해야 한다. 연과 연 사이에서 놀거나 행과 행 사이에서 놀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는 옛날 사람처럼 여유를 조곤조곤 나눠주는 사람이다. 시를 읽다 심장을 베이고 말았다. 결국 칼은 내게 향하기 때문이다. (한승태)

 

 


호숫가 학교

 

 

 

푸른 샛별로 세수를 하고 나오는 너희들이 모여

여기, 호수를 이룬다

 

너희는 자전거로 태양을 굴리고 오거나

걸어서

개울가 산사나무로 푸르게 얘기하며 오고 있구나

 

언제나 봄은 너희에게서 꿈꾸는 것

때로 휘날리는 꽃잎이며 노을이

어찌 너희를 앞질러갈 수 있겠는가

 

새들은 늘 너희들 날개 속에서 날아갔고

나무들 또한 너희에게서 숲을 이루거늘

저 강물을 따라가 보아라

강기슭도 단단한 하루의 노래가 되고

밤을 적시던 등불들도 얼마나 따뜻한 옷감이 되는가

 

때로 야콘을 파 헤집고

고구마의 굵은 야심작을 찌고

옥수수의 음률을 뜯으며

우리들의 시간도 익어갔거늘

 

다시 별들로 돌아오는 우리들의 호수를 잊지 말라

너희들 가슴에 긴긴 편지로 남아

너희들을 잊지 못해

여기서 동화처럼 늙어갈 이 호숫가 학교를

 

 

 

조성림 시집 <천안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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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호숫가 학교에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시인은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학생들에게 뜻있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오래 전부터 내게 졸랐다. 나는 어렵지 않게 약속하였건만 그는 잊을만하면 전화를 주곤 했다. 내 기억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름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가 학생들과 나누는 애정을 시 하나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때로 야콘을 파 헤집고 / 고구마의 굵은 야심작을 찌고 / 옥수수의 음률을 뜯으며' 그들의 시간도 익어갔다는 걸 충분히 알겠다. 이런 구체성이 없었다면 적당히 감상을 자극하는 시로 존재했으리라. 그의 시는 구체성을 얻었고, 그의 학생에게는 두고두고 꺼내 즐길 수 있는 보물이 되었다. (한승태)

 

 


A와 나

 

 

 

A는 고통이다. A가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히 채운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A는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밤이다. A와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밤에도 낮에도 지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A는 결코 죽을 가능성이라곤 없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이승훈 시집 <환상의 다리> 일지사, 1976 중에서

 

 

 

이승훈 시인은 스스로 시론을 가지고 시 행로를 정확히 밝혀 놓았기에 그의 시가 어렵게 보여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의외로 쉽게 읽힌다. 그의 시는 수학공식을 보는 거 같기도 하다. 그만큼 명료하다는 것이다. <A와 나>에서 A는 고통이다. 그러니까 고통이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 채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면 고통에만 집중한다. 세상 모든 것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러니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A는 고통이고 나는 그의 남편이다. 밤이면 부부 관계하듯 고통이 내 몸속을 파고든다. 나는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 하나 한편 고통은 그만큼 매력적이다. 고통은 밤에도 새벽에도 낮에도 가리지 않고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여기서 고통은 집착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고통과 이혼하려 하고 고통을 죽이려 한다. 고통은 사실 나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것이니 내가 죽어야 고통도 사라진다.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고통과 뒤엉켜 사는 것이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나를 다시 인식시킨다. 이승훈 시의 여정은 나로 시작해서 너로 발전하고 너에서 그로 나아간다. 나도 너도 그도 결국 나라는 것이다. (한승태)

 

 


낮과 밤의 발걸음

 

 

 

내가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이 삶이라면

나무 말 열두 마리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죽음이다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 마을> 중에서

 

 

<낮과 밤의 발걸음>은 최승호의 시에서 꽤 난해하다고 알려졌다. 난해보다 대략의 의미는 유추되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우선 시에는 드러나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낮과 밤, 그리고 발걸음, 나무 말, 열두 마리, 삶과 죽음 정도다. 낮과 밤이니 시간과 연관이 있을 거 같고, 발걸음이 시간이나 세월 정도거나 그걸 사람으로 연장하면 인생 정도로 해석될 거 같다. 그러니 제목을 인생으로 상정하고 풀어보자, 그럼 본문에서 나는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거나 끌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끌고 가는 능동적인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삶이라는 얘기다. 그럼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열두 마리와 나무 말이 남는데, 나무 말을 해결하면 왜 열두 마리인지는 나오겠다.

이 시는 난해시라기 보다 신소리를 활용한 말놀이 시다. 말의 뉘앙스로 하는 말놀이이거나 말장난 같은 것이다. '나무 말'을 여러 번 빠르게 발음해보라, 그러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무 말'은 '남의 말'이라는 걸. 그러니 남의 말을 끌고 가는 사람이 산 사람이라면 남의 말에 끌려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열두 마리는 1년 열두 달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내가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도 어쩌면 착각일지 모른다. 삶이 나 혼자 주체적으로 살 거 같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인지심리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그날 아침에 어떤 정보를 듣느냐에 따라 하루의 의사결정에도 큰 연향을 미친다고, 페이스북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이다. 그만큼 주체적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가까울 거 같아도 그 간극이 삶과 죽음만큼이나 멀고도 가깝다. (한승태)

 


소름

 

 

 

 

당신은 내가 껴안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한다

사랑이 소름이 되어 꽃 피던 시절이다

 

당신은 내가 껴안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한다

미움이 소름이 되어 꽃 지던 시절이다

 

소름과 소름이 진달래 능선을 넘어가는 봄날

 

 

 

이홍섭 시집 <터미널> 중에서

 

 

사람은 누군가 죽도록 사랑해도 혹은 미워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에게 구현될 때 난감한 것이지요. 어떻게 한 사람을 죽도록 사랑했는데, 또 죽도록 미워해서 소름이 돋을 까요. 그게 나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진달래는 만발하고 햇살은 가득한데 산의 능선은 남의 여인 같은데, 시간은 벌써 저만치 갔다는 거잖아요. 미치겠습니다. 이맘 당신은 알지요. (한승태)

 


再 活 8

- 저수지

 

 

고여 있음으로 빛나는 물은 저수지뿐이다. 젖통이 열 개인 돼지가 새끼 열두 마리를 낳았다. 계산상으로는 두 마리가 굶어죽어야 하는데, 열두 마리 모두 살아간다. 에미가 양보를 모르는 새끼들을 떠밀어 골고루 먹이는 것이리라.

빛나는 물도 썩을 줄 안다.

고여 있음으로 썩을 수 있는, 썩어가는 바닥에서 부글거리는 애벌레, 언젠가 진흙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 날개를 푸드득이며 날아오르려는 애벌레의 생.

 

 

 

박기동 시집, 〈나는 아직도〉 중에서

 

 

재활은 저수지의 생태와 새끼 낳은 돼지를 병치로 보여준다. 저수지는 물을 가둬 담아놓은 곳이다. 저수지의 물은 농사에 쓰일 물이다. 고이면 썩는다는 경구를 비틀어 오히려 썩어서 빛나는 생을 얘기한다. 그 썩은 곳에서 알을 까고 나오는 애벌레, 날아오르는 애벌레도 이 세상에 함께 사는 생명이다. 그래서 빛나는 물이 된다. 그러니까 저수지의 썩음도 생명을 부활시키듯 열두마리 새끼를 낳은, 젖통이 열개인 돼지가 여분의 생명을 살린다. 새끼들은 본능에 충실함으로 분명 두 마리 새끼는 어쩔 수없이 죽을 수 있음에도 어미의 자애로 모두 산다. 이렇게 보면 저수지의 새로운 생명과 돼지의 생명을 병치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건 인간 삶과 자연의 생명을 병치하여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구도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써늘하다. (한승태)

 

 


키친 가든

 

 

 

네 자 다섯 자의 조그만 정원

단풍나무와 콩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낮은 담을 둘러

아침 햇살을 들여놓은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자라는

 

키친 가든에서

오이를 다듬고, 팬을 달구고

데치고, 간을 맞추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는

 

키친 가든에서

아욱이 자라고 대파가 통통해지고

감자에 싹이나고

부추가 삐죽해질 동안

딸기가 익어가는 동안

콩과 시금치가 맛이 드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끓는 소리, 찧는 소리, 씻는 소리

스-윽 베는 소리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이윽고

우리가 심은 씨앗들이,

모르는 동안이,

샐러드가 되고, 파강회가 되고,

수프가 되고, 무침이 되었을 때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말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

감자와 딸기와 부추가 말했다

"향기가 없는 나물을 씹는 것 같애"

-그녀를 위로해줘

 

이제는

파꽃이 피고, 곰취가 웃자라고

배추가 시들고, 잡초만 무성해진

모르는 동안만 사랑했던

네 자 다섯 자의

 

키친 가든에서

 

 

 

함성호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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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詩지. 이 풍성한 시는 보는 즉시 냄새가 나고 장면을 떠올리며 웃음이 난다.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게 필요한 게 아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왁자지껄 하며 친구들과 어울린다. 초대를 받은 사람도 있고, 초대를 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 누구여도 관계없다. 즐겁게 준비하고 만들었다. 요리를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괜찮다. 함께했기에 이미 왁자지껄하고 흥성해졌다. 그러니 약간 부족한 그녀나 그를 위로해줘야 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나도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위로 받는 아침이다. (한승태)

 

 


사초하던 날

 

 

 

조상대대로 묻혀온 선영에

퇴락한 분묘를 봉분하고 오다

문득

오늘 같이 누운 내 모습을 보았네.

피와 살도 체면과 못 바꾸던

할아버지는

한 뙤기 밭도 없이 돌아가셨네.

 

쨍쨍한 어느 날

할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다

양반도 죽고 상놈도 죽은

묘를 보았네.

 

백옥의 뼈로 누운

명령도 복종도 없는 풀밭

아이들은 수천의 침묵을 깨고

친구되었네.

보았네.

개헤엄 안친 양반과

정강이가 휘어진 오늘의 양반을

나는 보았네.

 

 

 

이무상 시집 <사초하던 날>, 시문학사, 1983 중에서

 

 

얼마 전 어머님이 돌아가셔 아버지와 합장하였다. 봉분을 헐고 같이 모시고 당시 봉분을 세웠다. 사초도 비슷한데, 지금이야 화장과 납골문화가 번성하여 모르는 이가 많지만 사초는 무덤을 보수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묘의 봉분이 주저앉거나 짐승이나 풍수해로 훼손되면 한식이나 손 없는 날을 택해 보수한다. 먼저 제례를 지내고 흙갈이 하고 떼를 새로 입히는 일가붙이들의 행사다.

화자는 선영의 무너진 봉분을 다시 세우며 거기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같이 누운 자신을 본다. 피와 뼈, 살로 이어진 조상이기에 그럴 수 있겠고 죽은 이들이 모두 흙이고 그 흙에 푸른 침묵으로 자라며 눕고 일어서는 풀밭이기에 그럴 수 있겠다. 정황을 보여주는 1연과 달리 2연에서는 조상 묘처럼 목소리 돋우는 가문의 높으신 양반 이야기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고, 죽어서는 명령도 복종도 위아래도 없는 풀밭이라는 전언은 울림이 크다. 줄지어 내려오며 봉긋한 무덤에 양반이면 뭐하고 상놈이면 뭐하겠는가? 평등하게 풀로 돌아가 고스란히 친구가 되는데, 살아있는 자들만 높낮이를 따지는 걸 그는 보았다. (한승태)

 


슬픔이라는 빌미

 

 

 

빌미라는 낱말이 낯설어서 밤에 사전을 폈다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근원 없이 어지러운 우리말이라는 걸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알 듯 모르는 모든 말의 꼬리에 실을 매달아 보내고 싶었다

 

빌미라니, 한 생의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린 신의 머리카락 쯤 되려나

 

겨누고 싶지만 빗나가는 말의 화살이 있다면, 저 빌미쯤 되겠지만

 

당신 없는 오후에 사전을 뒤적인 것은 빌미라는 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한 슬픔이 또 한바탕 오려던 찰라, 이 슬픔의 빌미가 된 것은 무엇인지

 

발꿈치를 들고 숨어버린, 세상의 어느 조용한 시간에게

잠시 따져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민왕기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중에서

 

 

이 시에서 ‘빌미’를 입 속에 넣고 굴려본다. ‘빌미’라는 명사,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빌미라는 말의 뜻보다 감정의 촉각을 오롯이 세운다. 발꿈치를 들고 숨어버린 얼굴, 혹은 신의 머리카락, 숨은 슬픔이 무엇인지 골똘히 감정의 실마리를 끌어당긴다. 이는 시를 읽는 빌미로 쓰일 수도 있겠다. ‘무량’이나 ‘어둑’처럼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던, 애초에 명사든 ‘조금’처럼 부사를 사용하든, 의외의 과일이거나 음식이든, 그는 말의 결에서 환기시키는 감정을 온전히 살려낸다. 그의 말이 가 닿는 건너편에 당신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돌고 돌아온 말의 결이 시의 풍성함이다. (한승태)

 


불을 끄고 누워서

 

 

 

간간이 차가 지나간다.

어제도 작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작아진 달이 빛난다

 

빛나는 달에게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둠이 모여서 어둠이 되려면

좀 더 많은 어둠이 쌓여야 하지만

이제 나에게 어둠은 충분하다

 

걸었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서

내가 했던 생각들 모두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무릎에 힘을 주었다

 

어디에서 그칠지 모르는 생에 대한 두려움도

어쩌면 이 생을 견디는 기쁨이지 않을까?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모시면서 살기 때문에

어쩌면 은밀하게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불을 끄고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창밖 텅 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그 안주머니 같은 어둠 속에

나도 있다는 생각은 포근하지만

어둠 속이 넓은지 어둠 밖이 넓은지

 

 

 

안주철 시집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중에서

 

 

어둠 속을 걸을 때, 산속을 혼자 걸을 때, 어두운 방안에 혼자 있을 때, 누군가 지켜본다는 것은 참 서늘한 일이다. 집안에는 부모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산에서는 산신이나 조상이 지켜보고 있다. 시인은 그런 두려워하는 것들을 모시면서 살고 또 그것을 은밀하게 즐기기 때문에 자신의 안에 충분한 어둠이 고였고 그래서 불을 끄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보이고 안주머니 같은 어둠이 포근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어둠을 이토록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다니. 참 용한 일이다. 어둠이 두려운 게 아니라 어둠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이 무서운 것이고, 만나는 타인이 두려운 것인데 그런 것들이 어제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왔을 게다. (한승태)

 


우물에 대한 기억

 

 

 

계산속으로는

하루에 하루를 더하면 이틀이 맞다 맞지만

두레박에서 부엌까지

여름에서 다시 여름까지

하늘을 이고

물동이가 오간 거리는 별들이나 읽을 수 있던 시간

 

할머니 적 얘기다

우물 안 개구리가 구름 위로 팔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버드나무 화살촉 하나가 그 어두운 구멍을 향해

잘못 쏘아지기도 하고

넘칠 일 없는 함박눈이 둥근 적요를 메워보려고

무리하게 겨울을 온통 겨울로 안간힘 쓸 때도

무릎 한 번 출렁이지 않고 그냥 버렸을 거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년

뒤란 장독대를 반짝여주던 북극성을 묻어버리고

버드나무 밑동을 잘라

마지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저녁

 

남몰래 지워진 길이 하나 있었을 거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았던 시간이 저 홀로

먼 길을 가고 있었을 거다

눈물 흘러넘치면서

먼 산 무덤 속으로 그 하루를

무쇠솥에 펄펄 물 끓였을 거다

 

이건 다 할머니 적 얘기

돌아오기도 전에

일찍 집을 떠났던 아버지는 아주 멀리서

너무 늦게야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이를테면, 내가 어머니를 우물에 빠뜨리고 나서야

물동이가 비어 있었음을 알아챘듯이

 

 

최준 시집 <칸트의 산책길> 황금알,2021 중에서

 

 

우물로 이어지는 가계가 있다. 보통은 여인들이 그 길을 이어온다. 할머니에서 어머니에게로 다시 딸에게로 이어지는 물의 길 말이다. 그 우물이 할아버지를 낳았을 것이고 아버지를 낳았고 나를 낳았다는 건 자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비난수하던 장독대 위에서 할머니나 북두성, 삼신의 보살핌을 받았던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우물을 오래 들여다보던 하늘이, 물의 가계가 사라졌다. 고난과 곤란의 길이었기에 떠나고 싶었을 게다. 그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던 버드나무는 할아버지가 심었을지 모른다. 다 떠나고 남겨진 우물과 버드나무는 이제 생명을 다하고 먼 산 위로 하늘로 올라갔다. 뒤늦게야 자신이 텅 비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인생이다. 잃어버려야 하지 말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잊혀가는 민담처럼 본다. (한승태)

 


고라니

 

 

 

식물도 사람 발자국 소리 알아듣고

알아들은 만큼 큰단다,

씨 뿌렸다 될 일 아니고

밭에 자주 다녀야 된다는 어머님 말씀인데,

 

오리걸음 호미질 끝내고 뒤돌아보면

벌써 밭고랑 뒤덮으며 쫓아오는 풀들,

온 사방은 풀들로 가득한데, 얘네들은

우리가 먹을려고 심어놓은 잎사귀들만

골라서 뜯어먹고 간다, 널린 발자국들.

쟁기질이 무색하다.

 

 

 

최계선 시집 <동물시편>, 아이북 2017

 

 

최계선의 고라니는 참 재미있는 시다. 나는 이 시를 보면서 대칭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잡초라고 생각하는 풀도 알고 보면 세상의 쓸모가 있어 핀 것인데 인간의 관점에서 잡초고 쓸모없다는 딱지를 붙이고 걷어낸다. 자본주의가 시간을 분절하기 이전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대칭성이 지켜졌다고 본다. 인간과 다른 생물들 간의 대칭성을 통해 건강한 균형을 이루어왔다. 산업자본주의의 기계화 수탈 이후 그 대칭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우리는 곡식을 키우기 위해, 호미질로 잡초를 제거하지만 잡초의 생명력은 인간이 가꿔내는 곡식에 비할 바 아니다. 거기에 인간이 키운 곡식만을 고라니는 잡초 제거하듯 뜯어먹는다. 고라니나 인간이나 같은 식성이다. 그러니 같이 살아야지 별수 있나. 고라니의 균형 감각이 대단하다. 이것은 시인의 균형 감각이기도 하겠다.(한승태)

 


꽃사과 나무 그늘 아래의 일

 

 

 

다산한 여자 같은 저 나무는 많이도 늙었다

몇 차례 온 몸을 쏟고 또 한 배를 갖은 걸 보면

몸통이 들썩일 정도로 숨소리가 크겠다

 

국적을 옮겨 시집 온 여자가 그

꽃사과 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돌 지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아이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받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는 일

 

곰곰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푸른 말이 붉은 말로 옮겨 가는 일

그늘을 다 건너뛰고 저녁을 맞는 일

 

꽃사과 나무 아래서 하루를 산다 해도

알 수 없는 일 명명할 수 없는 일.

싹둑 전지한 자국, 욕망을 참은 흔적들만

알아듣는 내밀한 그 일.

 

 

김창균 시집 <먼 북쪽> 중에서

 

시인의 능청을 보면 웃음이 나오다가 끝내 엄숙하다 못해 전율이 온다. 사람 사는 일이 자연의 일과 저토록 자연스레 스미는, 내밀한 경지를 시인은 이토록 간단하게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좋은 시는 단단하고 군더더기가 없게 마련인데, 이 시 또한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읽으면 확연히 이미지가 떠오르고 의미가 직관적으로 다가온다.(한승태)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 불편당 일기

 

 

벌건 숯이 담긴 화로의 잿불 속에

시린 발목을 파묻고 싶은

혹한의 밤,

요강을 씻은 손으로

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지

 

괜찮아

쩍쩍, 달라붙어도 괜찮아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저 터무니 없는 약속,

(예컨대, 정치인들의 약속!)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식구들이 타고 앉은

요강 속

오줌에도 살얼음이 끼는 밤,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빌고 또 빈다

 

 

고진하 시집 <야생의 위로> 중에서

 

 

목사이며 시인인 고진하 시인께서 정말로 우리가 골고루 가난해지길 바란 걸까?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다며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약속을 꺼내 들었을 때 우린 알게 된다. 가난한 마술이야 혹한이 찾아오면 발생하지만 혹한이 아니어도 선거 때만 되면 잘 살게 해주겠다고 마술을 보여주겠다는 정치인은 왜 불량할까. 그 마술은 계속되었으나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겠다. 누구나 잘 살게 해준다는 마술은 누구나 똑같이 잘사는 게 아니기에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을 게다. 거기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평등하지 않기에 욕망을 부추기는 짓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표를 던지는 유권자도 안다. 그럼에도 그 욕망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그래서 시인은 차라리 골고루 가난해지자고 역설하는 걸 게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이 온통 뉴스에 오르내린다. 내 앞날은 내 투표에서 나올 게다. (한승태)

 


포옹

 

 

 

희미한 어둠 속 계단에 서서

그대 등 뒤로 손을 깍지 껴서 이승을 불 밝히면

심장 저 멀리 낮게 엎드린 눈물

그대 머리카락 적시러 지상으로 온다

 

 

 

박용하 시집 <한 남자> 중에서

 

 

 

시야에 수평이 확보되자 비로소 수직이 솟았다. 대지는 속에서 뚫고 올라오고 하늘 더 깊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대지는 물의 힘으로 자란다. 하늘은 어둠의 힘으로 넓어진다. 땅에서 하늘로 다시 땅으로 물이 순환하는 순간, 행복은 그 한 순간만 존재한다. 넘치거나 모자라면 다다를 수 없다. 넘치면 고통이 커지고 모자라면 갈증이 커진다. 하늘과 대지가 결합되는 것처럼 포옹은 근원적이다.

우리가 껴안고 있는 것이 사랑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의 모든 삶에 불을 밝히는 일. 새삼 그것이 눈물을 동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도 나도 늙어가고 있다. 신체적 나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 죽음과 삶의 순환이라는 거창한 원리라고 떠들지 않더라도 몸으로 느끼게 되는 나이 말이다. 하늘과 땅이거나 저승과 이승이라고 구분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는 곳이 저승과 이승이 껴안고 있는 곳이란 걸 나도 자연의 순리로 알게 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한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