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소중한 날의 꿈 (2011) /안재훈 한혜진 감독 본문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을 / 다 가 보지 못할 일이 서운하여서,/풀섶 속에 길이 구부러지는,/눈 닿는 데까지 오래오래/우두커니 선 채로 바라보았네.//그리곤 나는 갔네, 똑같이 좋고,/사람이 밟지 않고 풀이 우거져/더 나을지도 모르는 다른 길을,/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기론/두 길은 실상 거의 같았네.//그리고 두 길은 다 그날 아침 /밟히지 않은 가랑잎에 덮여 있었네./아 첫째 길은 훗날 가리고 하고!/길은 길로 이어짐을 알았기에/돌아오진 못하리라 생각했건만.//세월이 오래오래 지난 뒤에/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리./두 길이 숲 속에 갈라져 있어/사람이 덜 다닌 길을 갔더니/그 때문에 이렇게도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루스트 <가지 않은 길> 김종길 옮김
Written by 한승태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행복했던 적이 있나? 하고 문득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나? 내가 사는 것이 내가 꿈꾸던 삶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위해 11년 넘게 애니메이션을 그려온 이가 있다. 안재훈 한혜진 부부 감독이다. 아마도 이들은 같은 꿈을 공유하였기에 그나마 덜 힘들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하는 건 이들에게 부당하다. 더욱이 한국의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이 그렇다.
이들의 대단한 꿈이 시작된 춘천에서 며칠 전부터 상영되고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이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시장은 유아용이 아니면 시장이 없다고까지 하는데, 이들은 어쩌자고 중고등학생 및 어른을 상대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단 말인가.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이 아니면 애니메이션의 시장은 없다고 하는 그들에게 이들 부부 감독은 무슨 배짱으로 11년을 외고집으로 영화를 만들어왔을까!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이렇게 오래 매달린 영화가 과연 어떻게 영상의 동일성을 확보할까 걱정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대적 감각에 뒤처지진 않을까 걱정을 했었지만 그런 우려와 걱정을 이들 두 부부 감독은 깨끗하게 날려버렸다. 그들은 홈런을 쳤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랜 기간 작업한 티가 나지 않고 하나의 전체를 보여주었다. 이야기도 매끄럽고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의 청소년들의 감수성과 청소년기를 보낸 어른들의 감수성을 무엇보다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 사설을 집어치우고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김일의 박치기에 환호하고, 달나라에 간 우주인을 신기해 하던 그 때, 그러니까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만 행해지던 1970년대 후반, 이 나라에 사는 모든 학생의 삶이 그저그렇듯 그런 삶을 살며 자신의 꿈을 키워가던 그런 때, 최초의 우주비행을 통해 인간이 달에 대한 낭만적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던 그때가 영화의 배경이다.
우리의 주인공 오이랑은 자신이 가장 잘 한다고 믿었던 달리기에서 친구에게 밀리고,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는,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이 시큰둥해지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는 사춘기 소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심지어 교복까지도 몸에 딱 맞게 입는 세련된 서울 전학생 ‘한수민’과 영화관에서 만난 이후 친구가 되지만 초라한 자신을 자꾸 돌아본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여고생 ‘이랑’은 영화 <러브 스토리>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노라 막연히 꿈꾼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는 그저 헐렁한 교복이 불만인 인기 없는 소녀일 뿐이다.
주인공 이랑의 위크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별다른 존재 의식이 없는 자신의 내면에 한껏 위축되어 있는 이랑, 남들은 모두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뭘해도 잘 할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럴까? 미래에 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미래의 삶을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에 이랑의 고민과 상처가 있는 것이다. 이랑이 극복해야할 그 무엇이 이 영화의 추진력이다. 그런 추진력은 스스로 만들어내야겠지만 이를 극복하는데 가장 큰 조력자로 또래가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기의 가장 편안한 카운셀러는 천구인가보다.
뭘 해도 시큰둥한 어느 날, 이랑은 예쁘고 세련된 서울 전학생 수민을 보기 위해 몰려든 남학생들 틈에서 우연히 ‘철수’와 마주치게 된다.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인 철수는 학교 옥상에서 비행실험을 하다 추락하는 사고를 겪게 되고 이랑은 이런 엉뚱한 철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랑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무엇이 내게 부족한 것인지를 알아가게 된다.
라디오를 고치기 위해 전파상을 찾은 이랑은 삼촌 대신 수리를 맡고 있는 철수와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은 급격히 친한 사이가 된다. 그러면서 이랑은 철수가 품고 있는 꿈과 이상에 매력을 느낀다.
자신의 발명품으로 가득한 아지트를 공개하고, 라디오를 가져다 주기 위해 직접 집까지 찾아오는 철수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지게 된 이랑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설레임에 복잡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수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수민 앞에서 몹시 긴장하는 철수를 보고 이랑은 ‘나는 그저 친구일 뿐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알 수 없는 슬픔까지 느끼게 된다.
(영화를 보고 바로 썼어야 하는데, 한참이 지난 후 쓰려니 다시 한 번 영화를 봐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번 더 보고 쓸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