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 / 한승태
지옥도
그날은 한칼에 베어진 하늘이었고 바다였다
너와 나는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는 고유한 색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쪽에는 나의 하늘이 저쪽에는 너의 바다가 있었다
오직 하늘과 바다 그 갈라진 사이만이 시야에 가득했고
그 사이를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만난 건 아니었지만 계획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었기에 유리창에 굴러 떨어지던 물방울처럼 우리는 뭉쳤다
주문진 아래께 바닷가 가는 길에는 소나무가 아름다웠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햇살 아래 지옥에서 나들이 온 하루였다
살수록 재촉하는 마음, 지옥을 넓혀가고 있었는데
지난 겨울 시를 좋아하던 여인은 이제 시인이 되었고
망각을 찾아 떠났던 소설가는 탁구공이 좋아 흰 공에 갇혔지만
겨울을 나고 다시 만난 두 시인이 펼쳐놓은 바다는 과연 감칠맛이 났다
바닷가 시인은 서산栖山이 어울리겠다며 나에게 작명하였고
나는 대구로 해람海嵐이라 맞장구쳤지만 람嵐은 외람되어 갓 시인된 여인에게 돌아갔다
결국에는 무서워서 쓰지 못하고 있다던 무인無人을 무인撫人으로 주물러주었다
다시 영嶺 넘어 지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저 아래 어디 바닷가에서 기자를 하는 후배도 엊그제 시인이 되었다 하고
모래쟁변에서는 백석의 모시조개가 무한히 나이 금을 늘이는데
한잔 더 불콰해진 얼굴에는 노을이 장엄하였다
영嶺 너머로 붉어지는 지옥도를 앞에 두고 이런 날 하루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때론 바닷가에 유배 오는 날도 있어 죽을 맛도 술맛 아니냐고
파도가 주무르는 잔을 한 순배 부딪치고
*한병철 <피로사회>중에서
계간 <미네르바> 2017. 겨울호